<역사 속의 강원인물>
백성을 아끼고 사랑한 위민의 화신, 인재 김현도
권영상
인재는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터무니없는 전결 문제 때문이다. 호조에서는 농토가 많지 않은 양구현에 지나치게 많은 전결을 매겨 터무니없는 세금을 거두어갔다. 이 때문에 고을 백성은 해마다 세금에 짓눌려 살아야 했다.
`앞서 해 오던 현감들처럼 하면 된다. 호조에 밉보일 필요가 없다. 그러면 조정과 싸울 일도 없다. 현민들이 세금을 내느라 등골이 빠지든 말든 모르는 척하면 그만이다. 괜히 호조와 싸워 그들의 눈총을 살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인재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 하나 편하게 지내자고 200호 현민들의 삶을 팽개칠 수는 없었다.
`고을 백성을 내 가족처럼 생각하는 목민관이 되자.'
인재는 산세가 험난한 양구로 부임해 오던 그날의 다짐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고는 붓을 들어 상소문을 써나갔다.
“…… 우리 양구현에는 전하의 백성이 살고 있는 집이 채 200호도 아니 됩니다. 그들이 경작하는 전결은 불과 109결 4부인데, 호조에서는 206결 95부의 세금을 거두어 갑니다. 이런 탓에 우리 양구현민들의 삶은 피폐하기 짝이 없습니다. 행여 전하의 치세에 누가 될까 두렵나이다.”
인재는 상소문을 곧바로 조정으로 보내고, 동헌 뜰에 나섰다.
서쪽 하늘에 우뚝 솟은 사명산이 눈 안에 들어왔다. 앞선 현감들 모두 못 본 체해온 전결문제를 어떻든지 바로잡고 싶었다. 조정으로부터 먼 험난한 산속 고을 백성에게도 임금의 손길이 제대로 닿도록 해야 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지방 행정관이 고을 백성의 아픔을 헤아릴 줄 알아야 했다.
“현감님 덕분에 우리의 세금이 반으로 뚝 잘렸다면서?”
“허리 펴고 어디 한 번 편하게 살아보세!”
1588년 선조 21년, 인재가 보낸 상소가 드디어 받아들여졌다. 터무니없는 세금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된 고을 백성은 모였다 하면 현감을 칭송했다.
김현도는 1551년 명종 6년, 파주군 천현리에서 아버지 여연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예안이며 호는 인재이다. 어렸을 때부터 인재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율곡 이이와는 동향이며 학문을 함께 했던 성리학자 우계 성흔의 문하생이기도 하다. 인재의 학문은 갈수록 강물처럼 깊어져 당대의 널리 알려진 성리학자 조헌과 학문을 교류할 정도였다.
그는 1576년 선조 9년, 별시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군자감정, 사간원 사간, 성균관전적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쳐 1587년 양구현감에 제수되었다.
인재가 관아의 일에 골몰하던 1589년 선조 22년 어느 날이다.
“현민을 가족처럼 돌보시는 사또 나리! 청이 하나 있어 왔나이다.”
나이 많은 고을 백성 하나가 관아를 찾아와 하소연을 했다.
“이미 잘 아시다시피 양구는 산이 높고, 농토가 적고, 또한 척박한지라 공물을 쌀로 바치고 나면 양식이 부족해 굶주리는 이 또한 많습니다.”
“그렇다고 백성된 도리로 바치는 공물을 외면할 수야 없지 않소?”
인재가,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는 늙은 백성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물었다.
“산밭에 목화를 심어 그것으로 짠 목면이 어느 집이나 넉넉합니다. 목면으로 대신할 방도를 찾아주신다면 고을 백성의 시름이 한층 줄어들겠습니다.”
늙은 백성은 딱한 사정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알겠소이다. 착한 백성의 탄원이라면 나라 임금님도 반드시 들어주실 것입니다.”
인재는 그의 말을 다 듣고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가 가고 난 뒤 인재는 고을 백성에게 그 사실을 알아보았다. 그의 청대로 모두 쌀 대신 목면으로 공물 내기를 원하였다. 고을의 목면 생산을 살펴보니 무려 100여필이나 되었다. 그만하면 충분히 쌀을 대신할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목면을 바꾸어 바친다고 해도 뇌물을 원하는 감영의 하인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뇌물을 바치지 못한다면 목면 공물도 바치지 못한다.
“내가 상소를 올려보겠소.”
고을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인재는 피하지 않았다. 이러한 인재의 노고를 조정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상소는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전결공물 문제를 해결하자, 고을 백성은 다시 한 번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모습을 본 인재는 더욱더 고을 백성들 곁으로 다가가 그들의 고충에 귀를 기울일 것을 다짐했다.
“선비들에게 경학을 강론할 생각이오.”
인재는 먹고사는 일의 어려움에만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백성이 깨끗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려면 유교의 경전을 끝없이 공부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 공부 중에 예와 효를 빠뜨릴 수 없었다. 아무리 배부르고, 또 사는 일이 편해졌다 해도 사람 사는 도리를 저버리거나 삶의 이치를 모르고서는 짐승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겼다.
현감으로서 고을 백성을 위해 하는 공무는 적잖이 많았다. 그런 중에도 하루 일과를 다 마치면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고을의 선비들과 경학을 논했다. 또한 고을의 무지한 백성에게도 예와 효를 가르쳤다.
인재에겐 노모가 계셨다.
노모가 몸이 아파 누우면 인재는 관원의 손을 빌리지 않고 손수 탕약을 달여 드렸다. 그것도 먹기 쉽도록 한 숟갈씩 한 숟갈씩 뜨거운 약을 식혀 먹여드렸다. 뿐만 아니라 병환의 차도를 알아내기 위해 노모의 변을 직접 맛보기까지 했다. 말로만 예와 효를 가르치고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몸소 실행하였다. 이러한 소식은 소리 없이 온 고을로 퍼져나갔다. 양구현 내에 사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인재가 그러하듯 극진히 부모를 섬기고 이웃 사람과 예를 갖추어 살게 되었다.
1590년 선조 23년이었다.
임금이 세자궁을 크게 지으려 했다. 궁을 크고 화려하게 지으려면 큰 나무를 벌목하여 한수에 띄워 한양으로 보내야 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농사를 지어야 하는 장정들을 뽑아 부역을 시켜야 했다. 그 벌목 지시가 기어코 산중 고을 양구에도 내려왔다.
인재는 즉시 그 부당함을 상소했다.
“궁실을 크게 지어 백성의 원성을 사는 일은 세자에게 복이 되지 않습니다. 나라 안의 황폐함이 극심하고 상처가 많아 백성이 곤궁할 대로 곤궁해졌습니다. 이럴 때에 화려한 궁실을 지어 세자가 복을 누리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선조 임금께서는 인재의 바른말을 믿고, 세자궁 짓는 일을 중단하였다. 그러고는 오히려 인재의 충직스러움에 감탄하여 포상하였다. 그 일로 인하여 양구 백성뿐 아니라 한수를 끼고 있는 이웃 현의 장정들도 부역을 면하게 되었다.
인재가 양구 고을을 위해 이렇듯 애쓰던 1592년 선조 25년의 어느 날이다. 슬픈 소식 하나가 날아들었다. 인재의 양구현감 임기가 끝났다는 전갈이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토록 훌륭하신 현감님을 빼앗아 가려 하시다니!”
“저희를 두고 떠나시면 아니 되옵니다.”고을 백성들은 인재의 앞길을 막았지만 더는 어쩔 수 없었다.
함경도 정평도호부사를 제수받은 인재는 이듬해 양구현을 떠나가고 말았다. 인재의 벼슬길은 그 후, 서흥부사와 이천부사를 거쳐 해주목사, 예조참의에 이르렀다.
인재는 성리학자로, 또는 백성을 아끼고 사랑한 목민관으로, 임진왜란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살았다. 그러던 중 1610년 고향 파주로 낙향하여 60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현감님께서 돌아가셨다네!”
“7년 동안이나 선정해주신 그분의 은덕을 저버릴 수 없지.”
“우리 모두 그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또 오래오래 그 행적을 배워야 할 걸세.”
사람들은 인재의 선정을 잊을 수 없어 서암에 별묘를 세웠다. 그리고 그를 기억하기 위해 해마다 제향을 올렸다.
중앙관리와 지방의 행정관으로, 또는 성리학자로 오로지 백성의 편에서 그 백성을 위해 바르게 살았던 김현도. 그는 7년간의 양구현감으로서의 재임 중 부당한 세금 문제를 해결하고, 감영 중심이 아닌 백성 중심의 공물 문제와 뇌물 문제를 해결하는 위민정책을 폈다. 그뿐 아니라 예와 효를 가르쳐 고을 백성의 사람 사는 도리를 일깨웠음은 물론 스스로 효의 귀감이 되기도 하였다.
인재가 떠난 지 400여년이 지났으나, 지금도 양구군민들의 가슴속엔 그를 기리는 맑은 정신이 오롯하게 살아 있다.
(강원일보 9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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