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남자
권영상
빈집에 남자가 혼자 있다. 밥도 혼자 지어 혼자 먹고, 창문 바깥의 풍경도 혼자 본다. 배추 스무 포기를 심어놓고 아까부터 열심히 물을 준다. 물을 주고는 혼자 돌아서서 마당 의자에 걸터앉는다.
남자가 혼자 다리를 꼬고 앉아 귀를 모은다. 고추밭 건너편 산에서 아까부터 꾀꼬리가 운다. 소년 시절에 보았던 노랑빛깔의 꾀꼬리 소리가 쟁그렁 숲을 울려서는 남자쪽으로 날아온다. 먼 남방에서 온 꾀꼬리가 먼 곳에 집을 두고 내려온 남자의 마음을 달래듯이 운다. 매미들은 해뜨기 전부터 귀가 아프도록 운다. 마치 울어야, 많이 울어야 다음 생애에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약속을 받아낼 것처럼 절박하게 운다. 귀대할 날짜가 정해진 군대의 바쁜 일정처럼 운다.
산비둘기는 뭐, 하는 일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가끔가끔 운다. 그러나 그의 울음소리엔 마법이 있다. 가까운 산에서 우는데도 꼭 백여 리 먼 곳에서 우는 듯하다. 그의 울음엔 고적감이 묻어있다. 산비둘기가 울면 이승이 이승이 아닌 것처럼 아득해서 꼭 내가 지금 지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다.
남자가 햇빛을 피해 처마밑 그늘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숲이 유치원 아이들의 바이얼린 연습실 같이 소란하다. 소리가 모두 제각각이다. 맞추어 내는 소리가 하나도 없다. 그 소란스런 소리들 속에 군소리처럼 까마귀 울음이 끼어들고, 박새소리도 스타카토처럼 끼어든다.
그런데 그런 불협화음의 연습실 같은 소리도 성가시지 않다. 만약에 저기 저 산중이 도심의 공연장이라면 다들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게다. 도시란 정확한 계획과 정밀한 질서를 존중한다. 질서를 어긴다면 도시는 무너진다.
그러나 남자가 앉아 있는 이곳은 서울서 한 시간이나 남쪽으로 내려온 농가의 틈바구니에 있다. 산비탈에 앉아 있는 시골집들은 우선 무질서 하다. 떨어져 앉은 거리도 대중없고, 모양도 모양이려니와 지붕의 색깔도 저멋대로다. 집 마당에 개집 있고, 개집 곁에 창고가, 창고곁에 다알리아가 꽃피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집은 수세미꽃이 담장을 집어삼킬듯이 노랗게 핀다. 사과나무 밑에선 경운기가 물을 끌어올리는지 털털거린다.
길고 지루한 고추밭 이랑 끝에 어울리지 않게 전신주 하나가 아무 구도도 없이 멀컨히 서 있다. 아까부터 계획에 없는 누렁개 한 마리가 슬며시 나타나 전신주에 찔끔 오줌을 싸고 간다.
호박순 너머, 사람 머리가 보이더니 이내 할머니 한분이 나타난다.
“쪽파 좀 안 심을래요?”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묻는다.
그 할머니도 남자가 바라보는 이 풍경속의 또 하나의 풍경이다.
“어제 한 두둑 심었습니다.”
사내가 벌떡 일어난다.
“안 심었으면 한 대접 드릴 테니 심어요.”
할머니가 ‘지금 심을 때지요.’ 하신다.
며칠 전에 이사를 오느라 떡과 음료를 가져다 드린 할머니다.
“고맙습니다만 심었습니다.”
남자가 한 걸음 발을 내놓으며 다시 대답한다.
“내가 귀가 좀 부실해서.”
할머니가 그러고는 호박순 속으로 숨어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소통이 안 된다. 난데없이 할머니는 나타났고, 대화다운 대화도 없이 끝났다.
무질서한 풍경이 사라지고 다시 조용한 모드로 바뀐다.
달각달각....
열어놓은 문을 심심한 아이처럼 바람이 잡고 흔든다. 문 모서리가 벽에 부딪는다. 바람이 남자가 앉아 있는 앞을 살금살금 지나간 모양이다 얼핏 보기에 갓낳아놓은 어린 바람이다. 다 성장한 바람이라면 들판이나 산속을 쫓아다닐 것인데 사람 곁을 떠나지 못하고 어리광을 피우는 걸 보면 아직 어린 녀석이다.
남자가 바람을 잡으러 일어선다.
바람이 먼저 알고 달아난다.
하늘빛이 무거워지면서 이슬이 내린다.
오늘밤도 별이 무척 뜨겠다. 남자의 집 지붕 위에 그처럼 요란스레 뜨던 별은 처음이다. 이름도 모를 만큼 별로 잘 알지 못하는 사이인데도 남자를 찾아와 반짝여주는 별들이 고맙다.
얼른 밤이 왔으면 좋겠다.
남자가 밥을 하러 일어선다.
밤이 오고, 별이 뜨고, 밥을 먹는 일만이 질서있을 뿐 나머지는 무질서하다. 그게 흙과 더불어 사는, 남자가 지금 보고 있는 튼튼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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