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아버지의 무학

권영상 2013. 7. 17. 19:57

 

 

아버지의 무학

권영상

 

 

 

 

아버지는 무학이셨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나는 몰랐다. 그때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때도 학교에서는 아버지의 학력을 생활기록부 어디에다 적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무학에 대한 기억이 없는 걸 보면 확실히 나는 그 일에 관심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셨으니까 그게 학력과 무슨 상관이 있을 리도 없었겠다. 거기다 6살에 학교에 들어갔으므로 나는 철부지였다. 십여 리 되는 학교를 내 몸으로 가거나, 별탈없이 학교 공부를 마친다는 것만도 벅찼다. 그러니 아버지의 무학에 예민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 글을 읽고 쓰셨다. 어지간한 한자도 아셨다. 고전소설 몇 권을 손수 필사해 시집오셨을 정도였다. 내 소싯적, 어머니는 나를 무릎에 뉘여 그 글들을 무수히 읽어주셨다. 뿐만 아니라 이웃분들한테도 그 글을 읽어주시곤 했다. 어머니는 글을 잘 읽으셨다. 겨울이면 어머니가 읽어주시는 글을 들으러 이웃분들이 모였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은근히 자랑스러워 하셨다.

 

타관에 나가 있는 맏형이 집으로 편지를 하면 으레 어머니가 읽으셨다. 내가 4, 5 학년이 됐을 때에는 내가 형님의 편지를 대신 읽었다. ‘부모님 전상서. 양춘지절에 양단기력이 일향만강 하옵시며’ 로 시작되는 형님의 편지는 어려웠다. 무슨 뜻인 줄도 모르고 나는 읽었다.

내가 다 읽고 나면 아버지는 내 손의 편지를 받아들고 그러셨다.

“글이 능란하구나.”

나는 그 때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형님의 편지를 거꾸로 들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면서 마치 그 글을 한눈에 다 읽어내시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끄덕하셨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글을 모르신다는 걸 알았다. 지금 같으면 “아버지, 편지 거꾸로 드셨어요.”라거나 “글을 못 읽으세요?”라며 바로잡아 드리거나 여쭈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자식으로서의 도리가 아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버지는 구한말 순종 재위 기유년 시월에 나셨으니 서력으로 1909년생이시다. 거기다가 나를 마흔 연세에 낳으셨으니 내가 열 살 때라고 해도 이미 아버지는 머리칼이 허연 분이었다.

 

 

아버지는 네 형제분의 막내로 태어나셨는데 아버지만 유독 학문의 세례를 받지 못하셨다. 그건 대농을 하시는 할아버지의 뜻이었을 테니 내가 알 리 없다.

어쨌든 무학인 아버지는 ‘글’에 대한 그리움이 남달랐을 것 같다. 그런 까닭에 실감나게 어머니가 읽으시는 임경업전이나 임진록, 춘향전은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더 아끼셨다.

그 무렵의 어느 겨울이었다.

뜻밖에도 아버지가 내게 천자문을 가르쳐 주시겠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 말씀에 순종했다. 한때 아버지께서 맏형의 편지를 거꾸로 드셨다고 해서 그걸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야박한 편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 그거고, 천자문은 또 천자문으로 알았다.

 

 


아버지는 내게 천자문을 외라고 주문하셨고, 나는 그걸 외었다. 몇 번이나 아버지 앞에 앉아 천자문을 외던 어느 날이었다. 한참을 외어 가던 끝에 한 곳에서 막혀버렸다. 천자문을 펴 들고 계시던 아버지가 독촉하셨다. 그러나 막힌 글자가 생각나지 않았다.

“한 글자만 알려주세요.”

나는 아버지에게 청했다.

한자 밑에는 그 뜻과 소리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대답하지 못하셨다. 그 대신 입속으로 한참을 외어 그 글자를 알려주셨다. 아버지는 백부님께서 읽어주신 걸 외어오셔서 그걸로 나를 가르치셨던 거다.
나는 아버지의 무학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 그렇게라도 자식을 가르쳐보고 싶어 하시던 무학이신 아버지의 부성애가 아름다울 뿐이다.

 

(교차로신문 6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