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딸을 기다리며
권영상
퇴근을 하여 옷을 갈아입을 때다. 아내가, 딸아이가 택시를 타고 올 테니 아파트 마당에 내려가 기다려 보라는 거다. 가져오는 가방이 무겁단다. 가방이 가볍더라도 집에 앉아 기다릴 수는 없다. 시계를 보았다. 7시가 다 되어 가고 있다. 오후 4시 반에 인천 공항에 도착하였다니, 마당에 금방 들어설 것만 같아 서둘러 나갔다. 그러나 십여 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정문을 나서 한길까지 걸어 나갔다. 일몰이 만드는 노을이 서쪽 빌딩들 뒤로 붉게 번지고 있었다. 한길은 차들로 붐볐다. 차들은 그쪽 붉게 노을지는 언덕길에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휘몰고 오는 바람을 맞으며 길가에 선 채 딸아이를 기다렸다. 차가 막히는 모양이었다. 딸아이가 미국에 건너가 대학을 다닌 지는 세 해 반이 됐다. 그간 딸아이의 고충이 컸다. 마지막 방학을 하고 귀국한다는 연락을 며칠 전에 받았다. 벌써 8시가 넘었다. 돌아와도 충분히 올 시간이다. 나는 다시 돌아섰다. 아파트 정문 옆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딸아이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미 일몰의 빛이 다 잦아들고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고향집 마당에도 커다란 오동나무가 있다.
처음으로 내가 직장을 얻은 곳은 집에서 멀었다. 그런 까닭에 직장 근처에 하숙을 얻어 살았다. 집에는 두 주에, 또는 한 달에 한 번씩 갔다. 어머니는 병석에 계셨기에 오동나무 밑에 나와 나를 기다려주는 분은 아버지였다. 집은 넓은 들판 끝에 있었는데 먼데서 보아도 오동나무 밑에 서 계신 아버지를 나는 볼 수 있었다.
일몰의 하늘 밑 오동나무 아래에 서 계신 아버지.
아버지는 들판머리에 나타난 내가 보이면 집안으로 들어가셨다. 나를 마주 보고 서 계시기가 좀은 부끄러우셨던 게다. 그때만 해도 오래된 세월 전의 일이라 부자간이 지금처럼 친밀하지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는 나를 기다리시던 모습을 오동나무 밑에 남겨두고 안으로 드셨다.
병석에 누운 어머니를 돌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늘 무거웠을 테니 객지에서 돌아오는 내가 그립기도 하셨을 테다. 내가 그 오동나무 그늘을 밟아 마당에 들어서면 그제야 아버지는 사랑방 문을 열며 헛기침을 하셨다.
“애비가 못 보는 사이에 이렇게 왔구나!”
아버지는 나를 맞이해 주지 못하신 게 미안해 그렇게 말하셨다. 나는 고적한 사랑방에 들어가 오랜만에 뵙게 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어 절을 드렸다. 그간에 잘 지냈느냐? 아버지는 그 말 외에 더는 묻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말수가 적은 분이셨다.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으신 것도 많았겠지만 그게 다였다. 그게 아버지의 외롭게 사시는 방식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딸아이는 오지 않는다.
느티나무 밑의 어둠이 까무룩 깊어졌을 때다. 어둠 속 한길 쪽에서 이쪽으로 짐가방을 끌고 오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딸아이였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딸아이가 맞았다. 세 개의 커다란 짐가방을 끌고 메고 오고 있었다. 짐이 많기로 보란 듯이 택시에 앉아 아파트 마당으로 들어설 딸아이가 아니었다. 한길에서 내려 그걸 끌고 조금은 경사진 길을 거슬러 오고 있었다. 나는 달려가 딸아이를 맞았다.
“아빠가 못 보는 사이에 이렇게 왔구나!”
예전의 아버지가 내게 하시던 그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딸아이의 짐가방을 받아들었다. 어둠 속에서 보는 얼굴이지만 그간 많이 성숙해 있었다. 함께 짐을 끌고 집에 들어섰다. 저녁 준비를 마친 아내도 반갑게 딸아이를 맞았다. 딸아이는 간단히 손을 씻은 뒤 무릎을 꿇고 아내와 내 앞에 절을 했다.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딸아이 앞에 예전의 아버지를 닮은 내가 앉아 있다.
(교차로신문 2010년 5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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