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엄마들은 다르다
권영상
종례를 하러 교실에 가보니 구민이가 없다. 아이들 말로 점심시간에 ‘도망갔다’는 거다. 어제까지 학교에 안 왔다. 안 오면 며칠씩 안 온다. 근데 무슨 생각에선지 오늘 왔었다. 온대도 수업 시간을 채우는 법이 없다. 그냥 ‘앉아 있다’가 싫으면 가버린다. 타이르면 그 다음 날, 아예 나오지 않는다. 안 나오는 것보다 그래도 나오는 게 낫겠지 싶어 그애 눈치만 보다가 만다. 학교에 나온다 해도 별로 하는 게 없고, 안 나온다 해도 뭐 특별히 하는 일이 없는 게 구민이다. 그저 혼자 노는 게 전부다.
구민이 엄마는 담임인 나 보기가 민망해 아예 면담을 피한다. 지난 달엔 아버지가 오셨다 갔다. 한참을 하소연 하던 아버지가 일어서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구민이 가졌을 때 집사람한테 이것저것 참 많이 사주었거든요. 태교에 좋다는 클래식 씨디며, 자연의 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며 좋다는 거 다 사줘서 듣게 하고 그랬는데…"
왜 아이가 공부도 싫어하고, 의욕도 없고, 용기도 없는지 모르겠다는 말로 들렸다.
요즘 임신한 부부치고 태교에 관심 없는 이들이 없다.
태교 씨디 광고가 신문 잡지에 나오는 걸 나도 심심찮게 본다. 그걸 들려주면 태아가 똑똑해지고 정서적으로 잘 성장할 거라고 산모들이 믿기 때문이다. 음악이 태교에 미치는 영향이 입증된 모양이니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아는 인디언 엄마들은 다르다. 그들은 임신을 하면 집을 나와 홀로 대지로 나간다. 깊은 숲이나 들판으로 나가 자연과 직접 만난다. 거대한 산이며, 며칠씩 걸어도 끝나지 않는 숲과 아름답게 펼쳐지는 대평원을 뱃속의 태아에게 보여주거나 자연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들려준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언젠가 읽은 또 다른 인디언 엄마들의 태교 방식이 떠오른다. 뱃속에 아이를 가진 엄마는 크기를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세상 풍파를 겪은 오래된 나무와 마주 서서 그 우람한 모습을 아이에게 이야기해 준다고 했다. 또한 높은 언덕에 올라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이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과 장대하게 펼쳐지는 일몰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도 했다. 뱃속의 아이와 지금 엄마가 보고있는 것을 서로 대화하면서 자연과 직접 만나게 해준단다. 그 이야기를 듣고 세상에 나온 아이는 어떤 시련에 부딪혀도 그때 엄마의 목소리를 통해 들은 아름다움을 기억하여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디언의 엄마들은 지혜롭다.
자식을 용감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족이나 부족 사람들 중에서 훌륭한 인물을 선택한다. 그리고는 그의 행적을 모으고 그에 관해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듣는 노고를 아끼지 않는다.
오늘 날, 우리 엄마들의 태교와 전혀 다르다. 우리는 간편한 방식으로 클래식 씨디나 태교 동화 몇 권을 구해 방안에 누워 편안한 방식으로 듣거나 읽어준다. 자연과 직접 만나는 대신 방안에서 아무 노고 없이 태교를 한다는 점이 인디언 엄마들과 다르다.
우리는, 인디언들이 무지하고 폭력적이며, 체계적인 교육과 거리가 멀다는 식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백인들의 인디언들을 얕잡아 보는 태도에서 만들어진 허구이다. 비록 그들의 삶의 터전이 들판과 숲이었다 해도 우리는 그들이 자연과 직접 만나는 태교를 외면할 수 없다.
오늘날 인류와 지구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인디언의 지혜를 그 대안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 중에 태교도 놓칠 수 없겠다. 아이들이 점점 심약해지고, 아예 직업을 찾아보겠다는 의지나, 결혼을 하여 가족을 부양할 의무감마저 잃고 사는 젊은이들이 많다. 사회 탓으로만 돌리기엔 미심쩍은 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태교에서부터 뭔가 새로이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아이들이 너무 나약하다.
(교차로신문 2010년 5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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