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오래 살 줄 나는 몰랐다
권영상
지금 생각해도 그렇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은 정말 몰랐다. 지금 내 나이 오십대 후반이다. 내게 무슨 질병이 있거나, 어렸을 적부터 몸이 허약해서 이런 생각은 한 건 아니다. 나는 죽음과 자주 만났다. 열 살 안팎부터다. 집 뒤엔 호수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툭하면, 거기 듬벙이나 소에 빠졌다. 일을 하던 어른들이 호미나 괭이를 놓고 달려가는 꽁무니를 쫓아가면 어김없이 물속에서 시신이 나왔다. 배를 타고 호수에 들어간 잠수부들이 자맥질을 하여 익사체의 한쪽 발목을 잡고 배 위에 올라왔다. 그 무렵은 걸핏하면 그런 풍경과 마주 했다. 그건 마을 사람들이 달려가는 방향에서 나도 모르게 만나게 되는 비의도적인 충돌이었다. 아마도 산다는데 대한 두려움은 그때부터 시작된 듯 하다.
십대 중반부터 어머니는 16년을 병원에서 병마와 싸웠다. 그 무렵 나는 넝마주이 친구를 하나 알았다. 그는 열일곱 어린 나이에 가족을 부양했다. 어머니를 병원에 둔 나는 그를 만나 자연스레 술을 배웠다. 근데 어느 비 오던 날, 그가 죽었다. 그의 죽음도 여느 일과 마찬가지로 호숫가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뒤에서 만났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의 발목도 역시 잠수부의 손에 끌려 나왔다. 미리 와 있던 경찰은 뭍에 끌려나온 친구의 바지를 벗겨선 그의 죽음을 확인했다. 경찰은 선 채로 간단히 서류 한 장을 긁적였고, 그의 목숨은 그걸로 끝이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가 힘에 겨웠던 거다.
나는 그때 돌아오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스무 살까지는 살게 될까?’ 했다. 그때 내 앞에 닥친 스무 살은 5, 6년 남은 시간이었다. 나는 그때 잔명을 참 힘겹게 살았다. 학교를 다니면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내 의지에 의해서든 아니든 산다는 게 굉장히 두려웠다. 내가 보아온 죽음들과 마주 설 기운이 없었다. 내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나도 그들처럼 맥없이 스러져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내 기억에 죽은 자들의 발목은 너무도 희었다. 호수에서 잡혀나오는 발목들은 뽀얗고 통통했다. 고된 농사일이나 가족을 부양하느라 지친 자들의 발목 같지 않았다. 마치 부르조아의 몸뚱이 같았다. 어쩌면 죽은 자들의 꿈이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나는 20대가 되어 있었다. 20대 초반, 나는 우연히도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에 빠져들었다. 그 지루하고 지루한 문학 속에 별 저항 없이 빠져든 건 거기에 고단한 노동과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문학의 낡은 외투와 참혹한 굶주림과 또한 외로운 죽음과 마주하며 나도 모르게 또 중얼댔다. ‘서른 살까지는 살 수 있을까?’ 나는 그 무렵,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혼자 사랑방에서 주무시는 아버지가 가여웠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론 육십 가까이 살고 계시는 아버지의 나이가 부러웠다.
“언제 저도 아버지만큼 살게 될까요?” 내 말에 아버지가 그러셨다.
“가지가 꺾이고도 사는 설해목들을 봐라.” 배우신 게 없는 아버지는 그 설해목들의 인생을 생각하며 혼자 밤을 새우셨던 거다. 가지가 찢어지는 아픔을 또 어찌어찌 견디면 설해목은 또 제 몸을 추슬러 번듯해졌다. 30대를 넘기고 나는 결혼을 했다. 가족을 만들어 사는 동안 사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그만 잊었다. 지금이 그때다. 내가 부러워하던 그때 그 아버지의 나이에 와 있다. 나는 가끔 아버지가 남겨주신 그 말뜻을 생각한다. 아버지는 그 많은 소나무들 중에 여름날에 내뿜던 설해목들의 그 아름다운 초록빛을 보신 것이다. 아버지는 그 힘으로 인생을 견디셨다.
(교차로신문 2010년 4월 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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