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지를 깔고 먹는 짜장면
권영상
가끔 짜장면을 시켜먹을 때가 있다. 일요일 점심 때가 적당하다. 시켜 먹는 맛도 있다. 늦게 일어난 아침에 밥을 하기도 번거롭다. 그렇다고 그 시간에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출근하듯 외식을 하러 나가기도 그렇다. 나는 번쩍 수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여기 짜장면 셋이요.”
중국 음식 시키는 걸 아내는 싫어한다. 중국음식이 싫어서가 아니라 시간 여유도 있는 일요일인데 집에서 해 먹어야하지 않냐는 거다. 그 말도 백번 옳은 말이지만 직장이 있는 아내를 밥으로부터 한두 번은 벗어나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중국 음식의 좋은 점은 시키고 나면 금방 배달이 된다는 거다. 나는 그 배달 시간에 맞추기 위해 부랴부랴 창문을 열어젖힌다. 거실의 잡동사니들을 대충대충 치운다. 그러고 나면 읽고난 신문을 찾아 거실에 편다. 우리가 앉아 짜장면을 먹을 자리다. 넉넉하게 아내와 딸아이와 내가 앉을 자리를 만든다.
“식탁에서 먹지 왜 방바닥에서 먹으려고 그래요?”
그런 내 모습이 아내는 또 못마땅하다. 그러나 딸아이는 그게 그리 싫은 눈치가 아니다. 늘 먹는 식탁보다 거실바닥에 앉아 먹는게 낯설어서 좋을 테다. 내 손에 든 신문을 받아 저도 둥그렇게 겹겹이 편다. 같은 밥이라도 신문을 깔고 앉아 먹으면 나들이 기분이다. 예전, 아버지를 따라 벼베기 일을 도울 때다. 그 점심 때면 큰누나는 으레 밥을 이고 먼 논을 찾아왔다. 가까운 논두렁 나뭇그늘에 누나는 덮어온 삼베 밥보자기를 고르게 펴고는 그 위에 밥과 국을 놓았다. 아버지와 나는 갓베어 묶은 볏단을 하나씩 깔고 앉아 점심을 먹었다. 나는 그 점심이 좋았다.
들에서 먹는 것으로 점심만 좋은 게 아니다. 곁두리도 있다. 곁두리는 대개 점심과 저녁 그 긴 어름의 배고픔을 면케 하려고 내어오는 간단한 음식이다. 보통은 국수다. 때로는 고구마도 곁들인다. 막걸리도 뺄 수 없는 곁두리 음식이다. 잠시 일손을 놓고 앉아 땀을 식히며 먹는 곁두리가 좋다. 그 밥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먼먼 옛날 수렵의 아련한 향수 때문일까.
고시레!
아버지는 밥을 뜨시기 전에 꼭 대지를 향해 밥 한 술을 던지셨다. 그것도 왠지 지금은 다 사라진, 잊을 수 없는 기억 중에 하나다.
이윽고, 초인종 소리가 난다. 그 사이 음식 배달이 왔다. 팬티 바람으로 돌아다니던 나는 재빠르게 바지 하나를 꿰어 입고 문을 연다. 배달통을 든 젊은 청년이 들어선다. 배달통에서 내어주는 음식을 받아 나는 펴놓은 신문지 위에 차례차례 놓는다. 그가 문을 닫고 가면 음식 앞에 둘러앉는다. 오랜만에 가부좌를 하고 앉는다. 어디서 배웠는지 딸아이도 가좌부를 한다. 그러고 둘러앉으면 아내는 우리가 쓰는 수저를 앞앞이 놓는다. 나는 그것보다 나무젓가락을 든다. 그걸 두 가닥으로 쪽, 나누어 짜장면 가닥을 집어올려야 제맛이다.
격식을 차리는 것보다 허리를 숙여 면발을 물어올리는 조금은 야수적인 모습, 그게 좋다. 그게 바로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의 유전자 속에 흘러온 수렵의 향수가 아닐까.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면 왠지 밥의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신문지를 깔고 앉아 먹으면 그때마다 진하게 솟구쳐오르는 ‘밥’의 생명성을 느낀다.
(교차로신문 2008년 7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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