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기계도 인간과 오래 살면 인간이 된다

권영상 2013. 4. 1. 16:49

기계도 인간과 오래 살면 인간이 된다

권영상

 

 

 

 

컴이 죽었다.

지난 3월 27일 오전 11시 10분.

컴을 켜놓고 커피 한 잔을 만들어 다시 내 컴 앞에 앉았을 때 나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컴은 한 순간 희미한 빛을 벗고 검은 그림자의 모습으로 차갑게 잠들었다. 그 때 나는 오랜 날을 함께 했던 내 동지와도 같은 컴의 죽음을 보며 그의 아낌없었던 노동에 경의를 표했다. 동시에 나에 대한 그의 배려에 인간적 우정을 느꼈다.

 

 

컴이 내게 자신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암시한 건 1개월 전이었다. 전원을 받아들이기 거북해했고, 초기화면과 동시에 작은 경고박스가 뜨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에 오류가 생겼습니다.”

해당 프로그램을 찾아가 봤지만 제어판 속의 프로그램은 난해했다. 나는 몇 차례나 그 주소를 들고 프로그램의 골목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실패만 거듭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컴이 나를 두고 결코 떠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깊고 오랜 우정만 믿었다.

 

 

2003년산 싱크매스터.

그가 태어나 우리 집에 찾아온 건 10년 전이다.

처음 컴은 우리 집과 우리 집 바깥 세상과의 소통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새 제품이 나오자, 그는 그 역할에서 물러나 내 방으로 찾아왔다. 나는 내 낡은 컴을 버리고 이를 내 연필 대신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컴은 거의 7여년 동안 내 연필의 역할을 충실히 자임했다. 그는 그동안 6권의 동화집과 10권의 그림책, 4권의 동시집과 한권의 산문을 썼고, 이를 출판했다. 나와 함께 눈을 떴고, 나와 함께 그 힘들고 고통스러운 날을 동행했다. 지금도 내가 컴을 잊지 못하는 것은 나에 대한 컴의 탁월한 배려심 때문이다.

 

 

 

매주 화요일은 칼럼을 일간지에 보내는 날이다. 그 일은 무려 4년간 지속되고 있다. 화요일 오후 3시를 넘기기 전에 원고를 보냈었다. 그런데 그 일을 해내고 하루 뒤인 수요일 컴은 숨을 거두었다. 만약 원고를 보내는 화요일의 임박한 시간에 컴이 떠나갔다면 나는 원고 독촉에 또 얼마나 시달렸을까.

기계도 인간과 오래 살면 인간이 된다. 컴은 내게 인간도 염려하기 어려운 그런 배려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떠났다. 그러했기에 나는 컴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즉시 인터넷을 통해 컴의 심장을 복구하는 정보를 찾았다. 이윽고 나의 요청을 받은 심장 복구 요원이 달려왔다.

 

 

“출장비와 함께 복구하는데 드는 비용이 4만원입니다.”

사내는 그 말부터 먼저 했다.

"좋습니다."

나는 복구를 강력히 희망했다.

사내는 오래된 내 컴을 의미심장하게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가져온 작은 복구기계로는 데이터 회복이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 사진 자료도 없고, 동영상도 없는 컴이다. 다만 있다면 연필로 쓴 ‘한글’ 뿐인데도 자꾸 나를 긴장시켰다.

“비용이 좀더 들어도 복구하시겠습니까?”

사내가 다시 물었다.

“얼마나 들지요?”

나는 컴속의 오래도록 써온 내 연필글씨를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회사에 가져가 컴의 상태를 진단해 봐야 알겠습니다."

 

 

 

사내가 컴을 들고 집을 나갔다. 회사에 돌아가 보다 성능 좋은 기계로 살려봐야겠다는 거다. 사내가 컴을 가지고 떠난 지 하루가 지났다. 아무 소식이 없었다. 또 하루가 지나던 오후 3시쯤 전화가 왔다.

“하드디스켓에 불탄 흔적이 있지만 약간의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자면 복구하는데 또 다른 비용이 필요합니다. 총 15만원의 비용이 들겠습니다. 복구를 하시겠습니까?”

사내가 빠른 속도로 복구를 할건지 말건지에 대한 선택을 강요했다. 그 순간에도 나는 내 컴속에 든 연필로 쓴 글을 생각했다. 2개월 전, 외장하드에 저장해 두어 그간에 쓴 글의 양은 적었다. 그러나 비록 단 한 줄의 글밖에 남지 않았다 해도 그들을 버린다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컴이 내게 보여준 배려 때문도 있지만 내 글에 대한 예의도 예의였다.

“좋습니다.”

나는 허락했다.

 

 

 

하루 안에 해결해 보겠다는 사내는 하루가 지나도 전화가 없었다. 또 하루가 다 갔다. 삼일째 되는 날 오전 10시였다. 사내는 내 불안한 심리를 최대한 이용하는 듯 했다.

“최선의 노력을 해 보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 회사의 기계만으로는 어렵게 생겼습니다. 기계임대료를 계산하면 총 22만원의 경비가 들겠습니다.”

사내는 컴의 목숨을 담보로 나와 계속 흥정을 해 나갈 태세였다.

컴을 태연히 사내의 손에 넘긴 것이 후회되었다. 사내는 내가 컴 속의 내용물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는 듯 했다. 컴을 돌려달라고 요청하자, 다른 손에 들어가기엔 너무 깊은 단계에 들어갔다는 거다. 나는 내 컴 속에 들어있는 연필로 쓴 글을 생각했다. 그것을 버린다는 건 곧 나를 버리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컴의 최후가 임박했음을 알릴 때 그 눈짓을 알아채지 못한 내가 후회스러웠다. 그간 컴은 심장 돌아가는 소리가 평소보다 컸다. 전원을 넣었을 때도 쉽게 접촉되지 않았다. 일을 하다가도 멈추면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때에도 나는 컴을 막연히 믿었다.

“그래도 금방 떠나가진 않을 거야.”

오래오래 갈 거라는, 컴에 대한 맹신이 있었다. 95세를 넘기신 어머니가 편찮으실 때도 백수를 하실 거라 믿다가 그만 잃고 말았다. ‘한글’만 쓰니까 컴의 건강상태가 좋으리라 믿은 것이 나의 실수였다. 사람도 그렇지만 기계의 건강도 나는 까닭없이 굳게 믿는다. 그 때문에 컴의 죽음을 맞이할 아무 준비도 없이 나는 덜컥 컴을 잃었다.

“어쩌시겠어요? 허락하신다면 복구하겠습니다. 복구를 못하면 비용은 청구하지 않습니다.”

사내의 목소리가 자꾸 나를 어떤 수렁속으로 잡아끄는 듯 했다.

 

 

 

“좋습니다.”

나는 또 승낙했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는 심정으로 적진에 가 있는 내 글에 대한 경의를 그렇게 표했다. 그러고 3시간 후, 뜻밖에도 사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복구를 다 했으니 복구한 자료의 제목을 메일로 보내겠다는 거다. 메일이 오고가고 그가 왔다. 사내는 새로 구입한 내 컴에 본문을 주고, 비용을 받아갔다.

 

 

컴은 갔지만 컴 속에 흐르던 영혼은 이렇게 내게로 돌아왔다.

생각할수록 세상 모든 것들의 눈짓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새로이 태어나는 것들도 그렇지만 오래도록 사는 것들, 그리고 지금은 건강하나 가끔 적신호를 보내는 것들의 눈짓도 놓치지 말아야한다. 병들고 마침내 사라지는 것들은 인간만이 아니다. 인간들과 관련 있거나 없는 것들도 종국에는 모두 사라진다는 것을 컴은 내게 보여주고 갔다.

“좋습니다.”

내게 그런 대답의 매뉴얼이 있어 참말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