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투리의 행복 추구권
권영상
이혼하기 귀찮아 결혼하지 않는다는 늦깎기들의 말을 가끔 듣는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그들의 결혼관에 좀 허탈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들 말에 일리도 있다. 2011년 통계자료에 보면 우리 국민 1000명당 5쌍이 이혼을 했다. 그 당해에 33만쌍이 결혼하여 11만쌍이 이혼을 했다. 이혼을 많이 한 시기는 주로 신혼시기로 결혼 후 3~5년 동안 이혼하는 율이 전체의 27퍼센트다.
그러니 이혼하기 귀찮아 결혼 안 한다는 말은 영 틀린 말이 아니다. 내 주변 사람들 중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에 갈라선 이들도 있다. 여객기는 이륙 후 5분이 가장 위험하다고 한다. 사람도 그와 같은 모양이다. 인생이라는 먼 여행길의 첫 출항인 신혼여행에서 제대로 귀환만 한다면 적어도 그 다음에 닥칠 이혼 위험시기는 3년에서 5년 사이다.
이혼을 하면 그냥 솔로로 살아가는 이는 얼마나 될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재혼은 내년에도 하게 되고, 나이 팔십에도 하게 될 테니까 당장의 통계란 있을 수 없겠다. 그러나 2011년 전체 혼인 건수 중 재혼이 차지하는 비중이 21.37퍼센트. 열 쌍 중의 두 쌍은 재혼이라는 거다. 재혼율은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추세인 모양이다.
사람의 수명이 점차 늘어 평균수명이 100 세라고 보면 결혼 후 배우자와 70년을 함께 살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한 사람과 함께 산다는 일이 고통일 수도 있겠다. 그 중 한두 번쯤 파트너를 바꾸어 보는 일도 긴 인생을 사는데 활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면 돌 세례를 받을 일인가.
어떻든 재혼이 이렇게 자유로워진 데는 약 40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한 마리 ‘까투리’ 때문이다. 그는 재혼을 하는 일이야말로 당당한 개인의 행복 추구권이라고 믿었다. 까투리는 조선 후기, 19세기 무렵 ‘백운 상상봉’이 바라다 보이는 숲에서 거처했다. 그녀는 장끼라는 남성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3명의 사내와 불운하게 사별한 여인이다.
그녀가 살던 시절은 여필종부, 열녀불경이부라는 경직된 유교사상으로 여인들이 높은 담장 안에 갇혀 살 때다. 그런 때에도 그는 현재의 남편인 장끼와 4혼을 하여 아홉 아들 열두 딸을 거느렸다. 한 마디로 결혼관과 성에 대한 의식이 분방하고 자유로운 여인이다.
그녀가 어느 배 고픈 겨울날, 남편과 함께 들판으로 식사를 하러 나가던 중에 최고급 요리를 만난다. 콩 요리다. 식탁은 논벌의 한 모퉁이었고 콩요리는 누군가 논바닥을 싹싹 쓸어놓고 후후 입김으로 티없이 닦아놓은 자리에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이 군침도는 콩요리를 앞에 놓고 까투리는 남편 장끼와 줄기차게 실랑이를 벌인다. 까투리의 말씀인즉 사람이 놓아둔 덫의 미끼다. 그러니 먹지마라였고, 그의 남편 장끼는 이와 달리 주린 자 달게 먹고, 목 마른 자 쉬이 먹는다는 옛말을 들어 먹겠다고 고집을 피운다. 결국 장끼는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주둥이로 콱 쪼으다가 덜컥, 덫에 걸리고 만다. 덫은 점점 목을 조여오고, 눈자위엔 영채가 사라진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아내 까투리의 심정은 이렇다.
“우리 부부 좋은 금실 누구더러 말할 소냐. 슬피 서서 통곡하니 눈물은 못이 되고 한숨은 풍우 된다. 가슴에 불이 붙네, 이내 평생 어이 할고.”
남편과 사별하는 까투리의 억장이 미어지는 심정은 또 이렇게 드러난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 설워마라. 너는 명년 봄이 되면 또다시 피려니와 우리 낭군 이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미망일세 미망일세 이 몸이 미망일세.”
까투리가 이렇게 대성통곡, 서러워하는 데는 다 그 이유가 있다.
눈을 감기 전에 장끼가 하는 이 말 때문이다.
“내 얼굴 못 보아 설워말고 자네 몸 수절하여 정렬부인 되옵소서.”
이 말은 장끼가 까투리에게 마지막으로 주고 간 유언이다.
이 말이 조선의 여인들을 오래도록 괴롭혔다. 조선은 남편 잃은 여성들에게 수절을 강요했다. 그리고 수절한 여인에게 정렬부인이란 훈장을 내렸다. 첫날밤에 남편을 잃은 여성도 평생 수절해야 했다. 그게 너무 가여워 며느리 맞은 집안에선 며느리가 자진하기를 원했고, 친정에선 출가외인이라는 이유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가문에 젊은 과부가 생기면 음독시켜 죽이기도 했다.
옛날, 어느 한 처녀가 있었다.
그녀는 결혼할 상대자와 결혼도 하기 전에 남자를 잃어 과부 아닌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천대받으며 사느니 저승에서나마 함께 살기를 원하여 무덤 주변을 맴돌았다. 그의 정성이 지극했던지 어느 날, 무덤이 반으로 쩍 갈라졌다. 그걸 보자, 여인은 무덤 속으로 뛰어들었다.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다. 소름끼칠 만큼 섬뜩하다. 평생을 과부로 눈총받으며 사느니 차라리 무덤 속에 뛰어들어 죽겠다는 이 내면에 수절이라는 족쇄가 있다.
이 족쇄는 대체 언제부터 여인들에게 채워졌는가.
조선 성종 16년, 1485년에 제정된 <경국대전>에 아녀자의 재혼금지가 명시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이전은? 그 이전은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웠다. 그 자유로움은 고려 때부터다. 일반적으로 고려를 암흑기라고 하지만 가장 남녀가 평등했던 시절이다. 부모의 재산은 남녀가 평등하게 상속받았으며 여자들은 결혼을 하여 시집을 갈 때면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가지고 갔다. 그러므로 결혼 후에도 권리 행사가 당당했으며, 남편이 남편답지 않을 땐 이혼을 했고, 물론 재혼도 수월했다. 그 또한 여의치 않을 때엔 남편을 두고도 정인을 따로 둘 만큼 자유로웠다. 왕실만이 아니라 사대부나 일반 평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풍습은 조선 중기까지 이어졌다. 부모를 모시는 일도 꼭 장자나 아들만의 몫이 아니라 딸들도 부모를 모셨고, 외손자도 외조부모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부모의 제사도 딸 아들 구분하지 않고 모셨다. 그러던 것이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남성들의 권위 추락과 함께 여권이 신장되자, 위기를 느낀 남성들이 신분제도를 강화하고, 여성비하와 여필종부를 강요했다. 이때로부터 여성들은 유교라는 교묘한 덫에 걸려 삶 아닌 삶을 살게 되었다. 남녀칠세부동석, 출가외인, 열녀불경이부, 칠거지악, 정렬부인, 은장도, 등의 방식으로 서러움을 당했고, 남성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 당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재가금지라는 혹독한 족쇄 하나를 더 얹어 여성을,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가문이나 남성 출세의 도구로 이용했다.
이러한 핍박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았던 외로운 여인, 까투리가 있었다.
까투리는 5혼을 청하는 또 다른 남성, 장끼를 보며 비교적 솔직하게 자신이 재가를 해야하는 이유를 밝힌다. 그 첫째가 그나 자신이나 ‘나이를 꼽아보면 아직 중늙은이’라 한다. 아직 한창이란 뜻이다. 그 한창 나이에 홀로 살다 죽기는 싫다는 것이다. 둘째는 아들 아홉에 열두 딸을 낳아 키우며 남편과 행복하게 산 경험이 까투리에게는 있다. 그러니 수절이라는 덕목을 위해 그 행복을 박차고 싶지 않다. 달리 말해 수절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셋째는 ‘장끼 따라감이 당연하다’는 걸로 보아 외로운 과부가 외로운 홀아비와 사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일이 아닌가 라고 반문한다. 마지막은 새로 얻은 남편과 아홉 아들 열두 딸년과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또 한번의 행복한 인생을 살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힌다.
이 논리는 남편 잃은 한 외로운 여인의, 까투리의 입을 빌린 비명에 가까운 통곡이다. 400년 전만해도 이런 생각은 유교의 나라 조선에선 불경 중의 불경에 해당하는 주장이다. 이 <장끼전>은 여성들의 행복 추구에 대한 의지의 발로이며, 동시에 조선의 강고한 여성 억압의 제도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조선은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이며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수없이 많은 조선 여성들은 유교가 만들어놓은 덫에 갇혀 눈물과 한과 분노에 시달리며 희생되었다. 그 전면에 힘없는 까투리가 나서서 여성의 재가 금지 철폐를 부르짖고 있다.
오늘 아침 신문에 놀라운 기사가 났다.
‘시간제 남편’이라는 기사다. 제목을 보면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했다. 결혼을 기피하는 여성들이 미혼이라는 차가운 시선을 피하기 위해 남편을 잠깐 빌려쓴다는 내용이다. 시간당 1만 5천원에서 2만원 수준이란다. 대여 업체들은 매너 있고 늠름한 ‘남편’들을 항시 대기시켜 놓고 있단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걸까. 여성들에게 있어 남편이라는 존재가 한 마디로 귀찮다는 뜻일 테다. 데리고 살자니 성가시고, 결혼을 안 하려니 ‘이상하게 보는 눈’이 싫고.
이제는 개인의 행복을 위해 이혼 재혼을 넘어 혼인 자체를 기피하는 여성들이 많다. 결혼을 한다 해도 출산을 거부하기도 한다. 그도 저도 아니면 아예 필요할 때만 돈 주고 남편을 빌려다 쓰는 이런 행복추구의 중심에 장끼가 아니라 까투리들이 서 있는 시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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