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의 꽃다운 정신
권영상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베란다로 나간다. 나팔꽃이 연일 핀다. 접시만한 크기의 보랏빛이다. 그런 나팔꽃이 아침마다 무려 스물 몇 송이씩 꽃을 개봉한다. 10여년 전이다. 아는 문단의 선배 한 분이 일본에 갔다가 일본 친구한테 얻어온 나팔꽃씨 중 대여섯 톨이 든 씨앗 봉지를 선물로 보내주셨다. 사는 곳이 아파트니 이렇다하게 심을 터가 없어 머리를 쓴 게 베란다 화분이었다. 화분에다 나팔꽃씨 몇 알을 심었다. 이게 제대로 꽃구실을 할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런데 내 생각이 빗나갔다.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길게 매어준 끈을 타고 베란다 유리문을 커텐처럼 초록으로 덮어나갔다. 앞동과 건너다 보듯이 맞대고 살아 시야가 좀 불편했는데 그걸 한방에 날려보내 주었다.
꽃 피기를 기다리던 7월 14일.
드디어 한 송이가 피었다. 야생화들도 그렇지만 나팔꽃도 그렇다. 누가 처음 피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투어 피는 속성이 있다. 꽃은 그 다음 날부터 일시에 폈다. 피어도 피어도 그렇게 많이, 그렇게 잘 필 줄 누가 알까. 해마다 보면 꽃은 그 해, 늦은 가을까지 꽉 채워 핀다. 때로는 첫눈이 내릴 때에도 이쪽 베란다 안에서 보랏빛 꽃을 천연덕스럽게 피워낸다. 보통은 눈 내릴 쯤 해서 나팔꽃 마른 줄기를 걷어내린다. 그래서는 들깨 바심하듯 꽃씨주머니를 부수어내어 얻은 꽃씨가 커피잔으로 두 컵. 그걸 직장 동료들에게, 또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십여 알씩 쭉 나누어 주었다.
친구들에게
자명종을 나누어준다.
자명종 속엔
보랏빛 꽃도 들어 있다.
시간은 똑 같이
아침 6시에다
맞추어 놓았다.
내 동시 ‘나팔꽃씨’이다.
나팔꽃이 다른 꽃에 비해 좋은 까닭이 있다. 매일 새로운 꽃을 피워낸다는 점이다. 수국이나 장미처럼 한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오래도록 피어 있는 것도 때로는 멋있다. 그러나 꽃이 꽃인 이상 꽃은 늘 새 꽃이어야 하고 예뻐야 한다. 장미나 수국이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한 번 피워올린 꽃을 구태의연하게 며칠이 되도록 그냥 두는 까닭은 다 이유가 있다. 꽃을 새로 피우는데 드는 비용 때문이다. 비용이 무서워 ‘헌 꽃’ 안에 비용이 덜한 향기를 진하게 만들어 넣는다. 새 꽃의 은은한 향기가 아름답지 ‘헌 꽃’의 진한 향기는 신선하지 못하다. 마치 게으른 여자가 옷 세탁이 싫어 똑 같은 옷에 진한 향수만 뿌려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무리 예쁜 미인도 같은 옷을 이틀만 입으면 본인도 그렇지만 보는 이들도 고개를 돌린다.
그 점을 나팔꽃은 오래 전부터 깨달았다.
비용이 좀 들더라도 매일 새롭게 꽃을 피우자는 게 나팔꽃의 신조다. 매일 새롭게 자신을 가꾼다는 일은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 그 정신이 예사롭지 않다. 그것은 시인의 정신과 다르지 않다. 어떤 시인들은 젊은 시절, 잘 나가는 시 한편 어떻게 써서 그 시 한 편으로 평생 시인행세를 한다. 그런 시인들에겐 잘 나가는 시 한 편은 있어도 시인 정신이 비어있다. 내일 새로이 꽃 피우기가 힘들다고 어제의 묵은 꽃으로 행세를 하는 건 비겁하다.
때로 잠에서 일찍 깨어날 때가 있다. 4시나 4시반.
두벌잠이 어려워 희뿜한 베란다로 나가면 나팔꽃 덩굴은 고요하다. 여름 날의 새벽 4시면 마을의 지붕이나 길거리가 다 보인다. 새벽잠이 많은 나팔꽃은 아직 일어날 때는 아니다. 그러나 아침이 가까워지는 5시쯤이면 다르다. 도르르 말려있는 꽃잎이 풀리기 시작한다. 마치 나뭇가지에 매달려 우화를 준비하는 곤충들처럼 날개를 펴듯 움칠, 움칠 꽃잎이 요동한다. 6시쯤 되어 뉘 집의 자명종소리가 울리면 때를 맞추어 푸득푸득 꽃잎을 편다. 한 송이가 피면 일시에 다른 꽃들도 핀다. 6시, 그 무렵이 나팔꽃이 아침을 개봉하는 시각이다. 그때면 내 마음 속 동심도 눈을 뜬다. 대체 누가 나팔꽃 속에 들어가 자명 시간을 똑 같이 6시에 맞추어 놓을까?
막 피어난 나팔꽃을 들여다 본다.
어제 피운 그 모양이지만 그래도 새 꽃은 아침의 영광처럼 새롭다. 이 수십여 송이를 피워올리느라 꽃줄기들은 지쳐있다. 보랏빛 색소를 만들어야 하고, 꽃잎을 디자인해야 한다. 꽃잎의 부위별로 다른 색소를 배분해야 하고, 꽃잎의 일정한 두께, 그리고 꿀벌을 끌어들이기 위한 꽃향기와 일정량의 꿀을 아침마다 수십 송이씩 할당해야 한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나팔꽃의 수많은 녹색 이파리들이 분담한다. 히야신스나 상사화, 제비꽃들은 짧은 시간 동안 화려하게 꽃 피우고는 그만 지쳐 죽어버린다. 이것만 봐도 식물이 꽃을 피우는 데 얼마나 많은 정력과 비용을 들이는지 알 수 있다. 그 점에 비추어 볼 때 매일 새 꽃을 피우는 나팔꽃의 꽃다운 정신에 나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또 몇 송이나 피었을까?”
잠자리에서 일어난 아내가 제일 먼저 베란다로 나간다.
거기 곱게 새로 핀 눈부신 아침의 감격이 있기 때문이다. 어제 핀 꽃이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면 아내나 나나 아침마다 베란다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하나 둘 서이 너이 다 여 일곱.....”
아침이면 몇 번이고 꽃을 센다.
꽃이 예뻐서도 그렇지만 세어주고 싶어서다. 우리들의 세는 소리를 들으면 꽃들도 새로 핀 보람이 있을 테다. 피어도 본 체 만 체 하면 꽃들은 또 얼마나 서러울까. 비용을 들여 피운 보람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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