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이야기동시 연재)
젤로가 사라졌다(연재 14)
이야기의 바다를 건너다
10. 처용
역병
신라 헌강왕,
그 시절의 3월은 울담마다 살구꽃이 피었다.
왕은 살구꽃 피는 마을 너머 개운포 바다가 떠올랐다.
“3월 바다가 보고 싶도다!”
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에겐 고민이 있었다.
역병이다. 역병은 백성을 괴롭혔다. 역병이 휩쓸고 간 자리엔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고 쓰러졌다. 왕도 신하도 마음 놓을 날이 없었다. 그런 때였으니
3월 봄 바다가 보고 싶다는 말도 괜한 말은 아니다.
짬을 낸 어느 날,
왕은 신하들과 개운포 바다에 이르렀다.
살구 꽃잎 지는 분홍 봄 바다는 풍랑 뒤처럼 잔잔했고,
지친 몸이 차츰 살아날 무렵,
왕은 떠나온 경주로 다시 무거운 행렬을 돌렸다.
사건은 바로 그때 터졌다.
난데없이 스멀스멀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점점 자옥해졌고, 그러더니 점점 세상이 어두워졌다.
“아니, 이게 웬일인고?”
길을 멈추게 하고 왕이 일관에게 물었다.
“필시 동해 용왕의 짓이므로 그를 위해 절을 짓도록 명하소서.”
일관이 아뢰었다.
왕은 곰곰 생각 끝에 명을 내렸다.
“바다 가까운 곳에 용왕을 위로할 절을 짓도록 하라.”
왕의 말이 끝나자, 안개가 걷히고 바다 쪽에서 맑은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처용이 바다에서 걸어 나오다
“바다에서 사람이 걸어 나온다!”
누군가 다급히 소리쳤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 다섯 사람!”
사람의 머릿수를 세는 들뜬 목소리도 날아왔다.
왕은 행차를 바다 쪽으로 돌렸다.
바닷가에 이르자,
건장하게 생긴 푸른 눈의 사내들이 3월 바다를 활짝 열고 걸어 나왔다.
“여섯 사람, 일곱 사람, 여덟 사람.”
모두 여덟 명이었다.
바닷가에 나와 선 그들의 몸에서 푸른 바닷물이 좌르르 쏟아져 내렸다.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모습의 사내들이었다.
“너희들은 누군고?”
왕이 눈을 떼지 못하고 물었다.
그중 나이 많은 이가 말했다.
“저는 동해 용왕이옵고, 이들 일곱은 저의 아들이옵니다. 방금 저를 위해 절을 지어주신다는 말씀에 너무 기뻐 왕을 뵈러 나왔나이다.”
그들은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췄다.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노래였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멋진 용궁의 춤이었다.
낯설었지만 우아했다.
그중에서도 일곱째 아들의 춤은 비할 데 없이 뛰어났다.
왕이 그를 불렀다.
“그대의 이름이 뭔고?”
그가 대답했다.
“처용이라 하옵니다.”
비밀을 캐묻다
처용은 왕을 따라 경주로 돌아가는 말 위에 올랐다.
바다를 떠나 산길로 접어들 때였다.
푸른 풍뎅이 한 마리가 처용이 타고 가는 말 머리에 내려와 앉았다.
“누구냐?”
잔뜩 긴장한 처용이 물었다.
“나는 미래의 나라 서울에서 온 젤로다.”
젤로는 가까이에서 처용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얼굴은 희고 기룸하며 턱수염이 짙었고, 눈은 깊고 푸르렀으며, 머리칼은 곱슬이었다.
젤로는 왕을 따라 경주로 가는 처용이 몹시 궁금했다.
“당신이 용왕의 아들이란 말은 인정하기 어렵다. 당신들은 어디서 온 누구인가?”
“풍랑을 만나 개운포에 닿은 페르시아 선원들이다.”
처용이 즉시 대답했다.
“용왕은 누구인가?”
“우리들의 노련한 선장이다.”
“하필 당신이 왕을 따라 경주로 가는 이유는 뭔가? 솔직히 말해 달라.”
처용이 한참 만에 대답했다.
“나는 병을 고치는 페르시아의 의사다.”
그 말에 젤로의, 처용에 대한 궁금증이 확 풀렸다.
“아, 알겠다. 그게 역병이 도는 경주로 가는 이유였구나.”
“그렇다.”
처용은 솔직하고 또한 진지해 보였다.
“함께 경주로 가지 못해 미안하다. 안녕!”
젤로가 붕 날아올랐다.
처용이 역병에 아내를 잃다
왕을 따라 경주로 온 처용은
일찍이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병원을 열었다.
처용의 손을 거쳐 간 환자들은 거짓말 같이 말끔하게 나았다.
그는 약도 쓰고, 간단히 수술도 했다.
이를 지켜보던 왕이 신하에게 명했다.
“외롭지 않도록 좋은 아내를 정하여 주시오.”
신하들은 많고 많은 여인들 중
예쁘고 예쁘다는 여인을 골라 처용의 아내로 들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처용은 역병 간호에 헌신적이던 아내를 그만 잃고 말았다.
그로부터 처용은 예전에 알던 부지런한 처용이 아니었다.
역병은 뒷전이고 밤늦도록 춤추며 노는 일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제는 그 누구도 옛날의 처용을 만나기 힘들었다.
그러자 경주 거리 거리에 야릇한 소문이 돌았다.
“처용의 얼굴을 그려 대문에 붙이면 역병이 들지 못한다네.”
사람들은 그런 방도를 찾아냈다.
그리고 집집마다 대문에 처용의 얼굴을 그려 붙였다.
“코는 주먹코.”
사람들은 그의 얼굴 그림을 보며 말했다.
“머리는 곱슬.”
“부릅뜬 눈은 파랗고.”
“수염 난 턱은 턱 불거지고.”
“역신도 겁이나 들어오지 못할 테지!”
“암. 줄행낭을 칠 테지.”
“저렇게 험상궂은 얼굴이면 역신도 무섭지 왜 안 무서울 텐가!”
어찌 되었건 역병은 경주에서 천천히 사라졌고,
나라는 점점 태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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