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시 <산수유꽃>
권영상
1. 경사리 산수유
분이야, 봄이 왔더레이. 경기도 광주군 백사면 경사1리, 643미터 원적산 산 아래 마을로 봄이 한창 왔더레이. 와도 참 억수로 왔더라. 소복히 사는 오십 호 쪼깐한 안마당과 비좁은 밭둑길, 밋밋한 산비탈로 와도 와도 참 오달지게도 왔더라. 전투 비행기가 마음먹고 탕, 던져버린 폭탄 있지 않느냐? 그 폭탄 터지느라 풍기는 독한 화약 연기처럼 산수유꽃 뭉게뭉게 마을을 덮었더레이. 향기는 또 얼마나 진하더냐 하면 말이다. 분이 네가 추운 독감으로 아스피린 먹고 밤 새워 어릿어릿하던 때 있었지? 그때 깜물 맡았다던 옛 일기장에 밴 매운 향기, 그 향기 같더라. 새삼 놀란 것은 봄이 와도 딴 데는 모두 두고 경사리만 딱 요렇게 골라오시는지, 몰라도 참말 모를 일이더레이.
2. 산수유는 봄을 기다릴 줄 안다
분이야, 산수유만큼 봄을 기다릴 줄 아는 나무가 없지 싶다. 얼마나 얼마나 기다렸으면 싸락눈 사각사각 내릴 때에 여린 꽃망울을 풀어헤쳤겠노. 세상의 나무들 겨울잠에 쿨쿨 빠져있을 때에도 산수유는 그런 시간에 잠들지 않고 봄을 기다렸더라. 그렇지 않고야 이 추운 사월에 뭐가 아쉬워 일찍 놀러나왔겠노. 나와도 빈손으로 오는 게 아니라 나뭇가지 끝끝마다 꽃을 한 접시씩 밝혀들고 나왔구나. 한 접시씩 촛불을 들고 먼먼 길을 걸어오신 성자들맨치로.
꽃핀 데는 나무만이 아니더라. 경식이 아재 얼굴에도 피었더라. 한 겨울에도 쉬지 않고 땅을 뒤치고 거름 주고 봄을 기다렸으니까. 밭 이랑 아라비아 무늬같은 밭 이랑을 뛰는 아이들 머리에도 꽃은 피었더라. 그야 당연하지. 봄을 기다렸으니. 분이야, 경사리만 봄이 유별난 것도 따져 보면 경사리 사람들이 유난스레 봄을 기다렸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3. 산수유나무 사이로
경식이 아재 집 뒤엔 사십 년을 우렁차게 출렁이는 봄바다가 있더레이. 봄바다를 보려고 뒷대문을 펄쩍 열어젖혔을 때 말이다. 출렁출렁 갈라지듯 갈라져 힘껏 뚫려나는 바다를 보았다. 그것은 태평양거나 대서양 너른데서 풍랑처럼 뛰놀다 온 거치른 파도더구나. 그렇지 않구서야 그 높은 하늘을 향해 어떻게 길길이 솟구쳐오를 수 있겠누? 그래서는 하늘을 온통 뒤덮어내던 그 터널 같은 산수유 사잇길을 걸었구마.
내가 그득한 꽃숲에서 하도 숨이 막혀 경식이 아재한테 슬쩍 물었봤데이.
여기가 시방 꿈길인가요?
그랬더니 꽃구름 뭉게뭉게 피는 봄바다구만요. 그러더라.
원적산 밑 보리밭에 뒷거름 내고 오다 보면 바다에 빠져죽었다가 되살아나오는 그런 기분이라 하더라. 원체 좋아서.
분이야. 지금 나는 꿈결같은 봄바다를 가고 있구마.
4. 마흔을 자신 산수유
밋밋한 고개 하나 넘으며 경식이 아재 아주머이한테 물었데이.
“이 나무들 연세가 얼매신기요?”
그랬더니 그 아주머이 슬며시 눈을 감고는 마음속으로 손을 꼽아 말하는데 말이다.
“울 아 첫 젖먹일 때 경식이 아부지 이거 심궜구마요.”
이렇게 말하더라.
그래 또 물어봤지. 그 울 아 지금 나이 멫이신교?
그랬더니 그 아 시방 서른시이 되네요, 그러더라,
그러니 이 산수유 연세로 말할작시면 분이, 너보다는 엄두도 못낼 만큼 많고 또 많으시더라. 그 말고도 아흔이나 자신 나무도 있고, 백 살을 온히 채우시고도 더 몇 살을 자신 나무도 많다하더라. 그런가 하면 이제 서너 살짜리 젖먹이도 있다하니 가족도 대가족이더라.
5. 경식이 아부지
분이야, 경식이 아재 아부지는 말이데이.
지금부터 구십 년전쯤 경사리에 호랭이 어슬렁어슬렁 다니러오던 그 옛날에 장가를 드셨다더라. 산수유 이쁘게 밤마다 필 때 산수유처럼 이쁜 신부를 맞아서 말이다. 신부가 얼마나 이쁘셨는지 산수유 피면 신부를 업고 마을을 돌고, 진달래 피면 진달래 꽃잎으로 꽃전 부쳐 자시게 하고, 찬눈 내리면 찬바람에 얼까보아 인조견 이불에 감싸안고 사셨대더라.
그러다 세상 뜨실 때 자식들 보고 하신 말씀.
평생 싸운 적 한번 없고, 내 신부 눈에 눈물 돌게 한 적 없다 그러셨다지.
그 할아부지 그렇게 여든 넷을 사시고 저승으로 가시던 일이 참 요상타, 요상타했다.
글쎄 언제 어느 날 어느 시각에 가셨냐면 말이다.
이쁘신 신부와 혼사하고 첫날밤 치루던 그 날 그 시간에 홀연히 가셨다더라.
사람이 함부로 죽기도 어려운 데 혼사하던 그날 그 시각에 가시다니! 신부를 사랑하셔도 참 아름답게 사랑하신 분이더라.
6. 코흘리개 사내아이
돌무더기 돌무더기로 이어지는 험난한 밭둑길에서 삼사십 년을 흙 한 줌을 그러잡고 사는 산수유 그 꽃 노란 그늘. 그 그늘 마늘밭에 떨어지는 뽀얀 햇살을 파뒹기는 암탉들이 살 쪘다. 댕댕이 어린 풀이며, 꽃다지며, 천대받는 냉이들마저 꽃수술이 노랗다. 멀리 눈 녹은 바람 맞으며 나와 선 볼태기가 언 코흘리개 사내 아이. 아이가 암탉을 꼬눈다.
“씨발! 절루 가!”
암탉들이 댕댕이 어린 풀 끄뎅이를 잡아물고 후닥닥 난다.
“너들 때문에 마늘이 못 크잖아.”
이름이 뭐냐 물어도 대답을 싫어하던 그 아이가 그러더레이!
7. 똥개들
분이야, 산수유 나중에 짓붉은 열매 키우는 건 말이다. 경사리 맑은 바람 덕분일 거다. 정말 바람 덕분이냐? 그것만은 아니다. 경사리만 비추는 색깔이 놀밋한 햇빛 때문이다. 정말로 햇빛 덕분이냐? 그것만이 아니다. 양분이 실하게 배어있는 껌껌한 경사리 흙 때문이다. 그러나 말이다. 진실로 산수유를 키우는 건 말이다. 그게 아니다. 경사리 개들이더라. 목덜미가 튼튼하고 어깨가 딱 벌어진 똥개들 말이다. 참 잘도 컸더라. 하품을 할 때마다 쩍쩍 벌려대던 그 큰 아가리. 그 큰 아가리 안에 날카로이 들어선 이빨이며 싯뻘건 혓바닥, 싯꺼먼 잇몸. 그 사나운 아가리로 왈달박달 짖어대는 목청을, 분이야! 너는 모를끼다. 굉장도 굉장도 참 굉장하더라. 산수유 곁에 얼씬만 해도 아가리에 가득찬 왁달박달을 뱉어내는데 다리가 떨려 오줌을 지리겠더라. 산수유가 마치 제 아비나 되는 것처럼, 제 소중한 누이나 되는 것처럼 범접을 못하게 하는 통에 산수유 열매가 그만 저절로 빨긋빨긋 익을 갑더라. 그 똥개들 덕분에.
8. 노인정 앞 느티나무
경사리 노인정 앞, 늙수레한 느티나무 아래에서 햇빛바라기 하시던 할아부지들 있잖냐? 그 분들 옷깃 사이로 또그르르 굴러들던 햇빛 한톨 한톨이 내 보기에 싸늘하더라. 파란 사월 하늘빛이 이분들한텐 오히려 추우시겠더라. 빈 안방이며 빈 사랑방을 두고 외롭게 느티나무 아래에 와 햇빛에 기대는 경사리의 봄. 해마다 봄이면 산수유 화사하게 피지만 그 산수유 꽃그늘에 몸을 숨기며 고향을 떠나는 허전한 짐수레들.....
맨드라미 쪼매만치, 울 밑에 부추 쪼매만치, 해바라기 쪼매만치씩 피던 안뜰엔 기둥이며 서까래가 지쳐 쓰러져 있고, 살려고 살려고 불 피워올리던 연탄들마저 늙은 짐승처럼 죽은 채 누워있더라. 그런 집엔 그 흔한 개 한 마리 없다. 그런 집엔 애들 헌 신발 한 컬레 없고, 안마당 빨랫줄도 빈 뱃속처럼 텅 비어 있더라.
그런 집엔 따뜻한 방구들이 없어 노인정 앞 느티나무 아래로 할아부지들이 모이더라, 햇빛바라기를 하시러.
9. 땅, 경사리 땅
“경사리 땅이라고 다 경사리 땅 아닙니다.”
수레에 비료포대 실어 던지던 경식이 아재가 탁, 침을 뱉더라.
“서울서 돈 좀 번다는 놈들이 경사리 땅 대충 다 사갔네요. 땅금 비싸게 쳐준다는 꾐에 여기 사는 촌놈들 덥석덥석 다들 팔았지요.”
분이야, 경식이 아저씨 얼굴이 벌개가지고 하시는 말씀 더 들어볼련?
“땅 팔아먹은 놈들 대처에 나가 담배가게 한다, 고깃간 한다, 도시 놈들 흉내내다 다 말아먹고는, 그래설랑은 또 우쨌는지 아십니까?
아. 그래서는 본디는 제 땅이고 지금은 남의 것이 된 땅을 빌어 콩심고 팥심는다 이 말입니다. 그러고도 눈깔은 높아설랑 예전 대학나무라며 섬기던 산수유, 그걸 아주 우습게 알아도 보통으로 우습게 아는 게 아니네요. 허, 씨발 놈들.“ 화가 많이 났더구나.
10. 그래도 경사리엔 봄이 온다
봄은 또 올 거데이.
분이야. 내년에도 경사리에 봄은 또 올거데이.
작년 이맘쯤 이곳에서 본 봄을 올해에 또 보듯이 내년에도 산수유 가지 서늘한 사이로 봄은 또 올 거데이.
잘 가요. 내년에도 삼월엔 어김없이 산수유 필 테지요. 그 때에도 산수유로 만든 술 마셔주시고, 산수유 전 드셔주시고, 산수유로 만든 차 마셔주시러 오세요. 또 오신단 약속만 해 주셔도 그 힘으로 살만은 하겠네요.
경식이 아재며 경식이 아줌마 그러시더라.
분이야, 네 생각에도 내년엔 봄이 오겠제?
그때쯤엔 경사리 사람들 제 땅에서 일하고, 떠나간 사람들은 다들 제 집으로 돌아왔으면 좋겠구나, 봄이 돌아오듯이.
<아동문학연구> 2008년 봄호
이 시가 2008년도 이후로 실종된 자식처럼 사라졌다가 오늘 우연히 옛 카페에서 발견했네요. 다시 잘 살려내야지, 하는 애착이 가네요. 여기 경사리는 내 기억에 경기도 광주 어느 산수유 축제가 간간히 열리는 동네 이름입니다. 거기 어느 하루 모처럼 배운 승용차를 몰고 가 놀다온 뒷날에 쓴 산문동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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