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와 함께 살다
권영상
동영상 카톡이 왔다. 교직에 있을 때 가끔 음악실에서 들려오던 ‘할아버지의 낡은 시계’라는 노래다. 그때의 음악실은 내 방 복도 끝에 있었는데 그 복도를 울리며 들려오던 노래는 학교를 좀 고즈넉하게 만들었다.
나는 동영상을 눈길을 주었다.
‘낡은 마루의 키다리 시계는 할아버지 옛날 시계, 할아버지 태어나시던 아침에 우리 가족이 되었다네. 언제나 정다운 소리 들려주던 할아버지의 옛날 시계, 하지만 지금은 가질 않네......’
헨리 클레이 워크가 만든 노래다. 영국을 여행하던 워크가 어느 호텔에 들렀을 때다. 멈추어선 큼직한 시계가 사람들 눈에 잘 띄는 로비 중앙에 서 있었다. 워크가 그 까닭을 물었다. 이 호텔의 주인은, 아들 젠킨스가 태어나자 그 기념으로 이 시계를 샀다. 또박또박 잘 가던 시계도 젠킨스가 나이 들어 숨을 거두자, 그만 저도 멈추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워크는 거기서 영감을 얻어 이 노래를 만들었다.
노래를 들으며 생각하니 고향에도 아버지 계신 사랑방에 클레이 워크의 시계가 있었다. 세상 문명에 둔감하신 아버지였지만 사랑방엔 문명 한 점이 있었다. 괘종시계였다. 농사일에 쉬실 틈이 없던 아버지도 아침이면 제일 먼저 ‘시계밥’ 주시는 일부터 챙기셨다. 그쯤이야 어린 우리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인데 당신만이 그 일을 하셨다. 가끔 우리가 시계 밑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올라 시계밥을 주면 아버지는 이튿날 아침 용케 그걸 아셨다.
“너희들은 건들지 마라.”
그렇게 해서 그것은 이내 ‘아버지의 시계’가 되고 말았다.
가끔 바깥에 나갔다가 집마당에 들어설 때면 사랑방에서 울려나오던 시계 치는 소리를 듣곤했다. 뎅 뎅 뎅 뎅....... 나는 소리가 그칠 때까지 멈추어 서서 숫자를 세었다. 아버지의 시계는 그 때 오후 5시이거나 아니면 6시거나 그랬다. 겨울철 깊은 밤, 잠이 안 올 때 사랑방에서 들려오던 시계 치는 소리는 이슥한 밤 11시 아니면 자정이었다. 아버지의 시계는 시간을 알리는 시보였지만 아버지의 숨결이기도 했다. 사랑방엔 아버지가 혼자 주무셨다.
“아버지 추우시겠다.”
자정을 알리는 시계 치는 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걱정하셨다. 그렇게 시계는 어머니에게 또는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는 일생을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가셨다. 그때쯤 아버지이시던 아버지의 시계도 멈추었다. 이미 세상은 옛 시대의 유물 같은 괘종시계에 관심이 없어졌고, 이리저리 밀려나던 괘종시계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고향을 떠나와 서울에서 산 지 40년. 그 사이 예닐곱 번의 이사를 했다. 그러느라 낡은 세간도 몇 차례나 새 것으로 바뀌었지만 40년 동안 내 곁을 지켜온 게 내 책상 위의 탁상시계다. 직장 동료들이 집들이 선물로 사들고 온 거다.
깊은 밤, 홀로 깨어 내 방에 들면 또 다른 나의 숨소리처럼 또각또각 돌아가는 시계소리를 듣는다. 시계는 나와 함께 이 먼 길을 걸어왔고 찰방찰방 추운 강을 건너 여기까지 왔다. 시계는 늘 그 자리에서 나의 시간을 나와 함께 만들어왔다.
‘낡은 마루의 키다리 시계는 할아버지의 옛날 시계.... 할아버지 태어나시던 아침에 우리 가족이 되었다네.’
오르골의 맑은 악기소리가 내 영혼을 또렷이 밝혀준다.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모두 곰스크를 그리워한다 (0) | 2020.03.01 |
---|---|
지금은 휴관 중입니다 (0) | 2020.02.23 |
겨울 무채밥 (0) | 2020.02.01 |
인사하는 아침, 안녕하세요? (0) | 2020.01.27 |
여행지에서 보내는 설 연휴 (0) | 2020.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