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무채밥
권영상
어렸을 적 어머니가 해 주시던 겨울 무채밥이 불현 생각났다. 잡곡에 무를 썰어넣고 지으시던 밥. 식구가 많아 늘 양식 걱정이던 어머니는 겨울이면 가끔 무채밥을 해주셨다. 뭐 그리 좋은 밥일 리 없는데도 그 생각이 나는 건 순전히 지금이 겨울이기 때문이다.
무채밥 타령을 했더니 아내가 선뜻 해주겠단다.
나는 차를 몰아 안성으로 내려갔다. 지난해 안성 텃밭에 무 몇 골을 심었는데 비교적 수확이 좋았다. 무김치 두어 통을 하고 남은 무를 구덩이를 파고 땅에 묻었다. 그날, 늦가을 비가 왔는데 비에 젖은 무를 묻으며 이게 혹시 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또 있었다.
괭이로 무구덩이를 헤쳤다. 조그만치 구멍을 내고 손을 들이밀어 무 하나를 끄집어냈다. 무를 보자 아!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린 시절 무 구덩이에서 꺼내던 그 무 그대로였다. 무 머리에 돋은 샛노란 무순이 겨울 햇살에 눈이 부셨다. 무는 내 걱정과 달리 어둡고 컴컴한 구덩이에서 이처럼 고운 금빛 순을 지어내고 있었다.
무 다섯 개를 꺼냈다. 밭에서 갓 뽑은 무처럼 싱싱했다. 무 밑은 파랗고, 불룩한 배는 희고 말쑥하고 통통했다. 무구덩이에 바람이 들까 꼭꼭 흙으로 덮고는 다시 차에 올랐다.
해마다 무는 잘 됐다.
배추는 배추벌레가 무서워 일찍이 포기했지만 무만은 믿음직스럽게 잘 자라주었다. 크고 단단하고 볼륨있는 무로 무김치로 담그면서 떠올린 게 있다.
“동치미 담가 먹자!”
뜻밖에도 아내가 동치미 제안을 했다.
여태 김장조차 우리 손으로 담그지 못했는데 동치미를 담그겠다니! 그러나 인터넷 동영상엔 동치미 맛있게 담그는 법이 수두룩했다.
동치미 담그는 재료야 별건가. 적당한 무와 무청, 배, 고추 약간이면 될 터인데 그 말고 특별한 비법 하나가 더 있었다. 댓잎이다. 댓잎은 동치미 독에 하얗게 끼는 일종의 버캐를 방지하는 비법으로 쓰인단다. 여덟 잎이면 충분하다지만 대나무가 살지 않는 중부 내륙의 도시 어디에서 그걸 구할까.
나는 작은 색종이 가위를 주머니에 넣고 무작정 우면산에 올랐다. 이 커다란 산 지향점도 없이 이 골짝 저 골짝을 헤맨 끝에 대성사 동쪽 산비탈에서 작은 대숲을 만났다. 그걸 구해 들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소금에 절인 무를 꺼내어 동치미 통에 담그기를 마칠 무렵이었다. 염도를 맞춘 물에 댓잎을 띄우고 뚜껑을 덮었다.
동치미는 겨울 음식으로 좋다. 길고 긴 겨울밤 잠이 안 오면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절편을 찌고 절편과 함께 동치미를 내오셨다. 절편의 궁합은 뭐니 뭐니 해도 동치미다. 얼음이 살짝 언 동치미 독에서 꺼낸 동치미 무와 동치미 국물은 갑갑한 속을 풀어주는 데 그만이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떡과 동치미를 ‘치맥’에 견줄 수 있을까. 안마당에 눈이 그득히 내리는 밤에 먹는 동치미는 생각만으로도 좋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무 다섯 개가 든 비닐봉투를 건넨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단단하고 잘 생긴 무 하나를 깨끗하게 씻어 아내가 무채를 썬다. 도마 위에서 번지는 무 냄새가 맑고 향긋하다. 이제 좀만 기다리면 아내가 해 주는 무채밥을 먹겠다. 맛있게 만든 파 간장 한 숟갈을 넣고 적당히 비벼먹는 무채밥은 좀 질어도 괜찮다. 그 밥에 동치미까지 곁들인다면 겨울 별미로 완벽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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