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풍에 돛을 올리는 운세
권영상
문득, 다가온 새해가 궁금하다.
예전 어른들도 새해가 궁금해 1월이면 화투로 그해 신수를 떼었다. 누구나 365일을 받아놓고 보면 이것이 어떻게 나와 화해와 불화를 거듭할 것인지 궁금할 테다. 사람이 신이 아닌 이상 그 일을 어떻게 알까만 그래도 그 알 수 없는 신년 운세가 그립다.
사실 신년 운세라고 해봐야 뻔하다. 곡간은 가득할 운세이나 나가는 재물이 더욱 많다. 사업운은 열려 있으되 가까운 사람 관계를 잘 해야 한다. 중반에 들면 원하는 것을 충분히 얻겠으나 매사에 신중해야 한다. 동업은 좋으나, 승진은 하겠으나, 재물은 들어오겠으나, 이성운은 좋겠으나 친구 이상은 피하라는 주로 경계 투의 내용이다.
그런 뻔한 운세지만 나는 여러 해 동안 1월이면 ‘무료 신년 운세’를 찾아다녔다. 운세를 읽는 그 시간만이라도 행여 뭐 좀 특별한 행운이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 없지 않았다. 컴퓨터를 켜고 무료 신년 운세를 열었다.
‘천일에 걸쳐 구름 한 점 없으니 하늘과 바다의 푸른 기운이 끝이 없을 징후다. 올 한 해 먹고 사는 것이 풍족할 것이며 순풍에 돛을 올리니 즐거운 노래가 절로 나올 괘가 찾아왔도다. 노력하면 그 보답이…….’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이 정도면 여기 들어온 보람이 있다. 무료치고 이렇게 행복한 미래를 점쳐주다니. 싫지 않다. 이쯤에서 읽기를 그치기는 너무 아깝다.
‘일신이 편안하여 산수를 가까이 하며 자연히 풍류에 빠지겠다. 그러나 깊이 빠지면 그 기쁨에 어두운 구름이 밀려들 수 있도다.’ 내 인생에 산수를 가까이할 풍류가 어디 있을까만 그래도 나는 이게 무슨 말인지 대충은 안다. 운세가 그리 나쁘지 않다는 말이다. 나는 이것저것 살피다가 운세 사이트를 나왔다.
‘올 한 해 풍족할 것이며 순풍에 돛을 올리니 즐거운 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 달콤하고 맛난 말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무슨 보물 어록인 양 자꾸 기억하려 한다. 순풍에 돛을 다는 세월이 어떤 세월인지도 모르면서 거기에 매달리는 순진한 나를 본다.
내가 싱긋이 웃으며 막 컴퓨터 앞에서 일어날 때다. 바깥일을 보고 들어오는 아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호들갑이다.
“요 앞, 치킨가게 있지?”
요 앞 치킨가게라면 아파트 정문에서 좀 나가면 있는 잘 알려진 체인점이다.
“그 가게 문 닫았어. 그리고 그 옆집 와바라는 맥줏집, 그 집도 문 닫았고!”
아내는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며 경기가 얼마나 나쁘면 이렇게 줄줄이 문을 닫느냐고 목청을 높인다.그들 모두 우리가 보기에도 굉장히 탄탄해 보이는 가게들이었다. 몇 년 전만해도 가게가 너무 잘 되는 걸 보아 넘기지 못한 집주인이 임대료를 턱없이 올렸다. 그때에도 그 골목에서 경쟁을 하던 다른 가게들은 문을 닫아도 굳건히 살아남았었다.
그들 가게가 잘 될 때엔 그 북적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는가 싶었다. 그들의 이익이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데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좀 우울하다. 내가 아무리 풍족하여 순풍에 돛을 올리는 운세라 한들 나를 둘러싼 이들의 삶이 힘들면 그건 풍족이 아니다. 나도 그렇거니와 그들도 풍족해야 그게 나의 풍족이고 나의 행복이다. 우리들의 운세가 내남없이 순풍에 돛을 올리는 그런 한해가 되었으면 하고 빌어본다.
교차로신문 2020년 1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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