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고속버스터미널 대합실

권영상 2018. 11. 23. 21:56

고속버스터미널 대합실

권영상




버스표 예매할 일이 있습니다. 볼일이 있어 토요일 충주에 내려가 다음 날인 일요일에 올라와야 합니다. 단풍철이 지났다고 해도 토요일은 붐빌 게 뻔합니다. 번거롭긴 해도 고속버스터미널을 찾아가 창구안내의 도움으로 표 사는 일은 좋습니다. 집에서 하던 일을 탁 털고 일어날 수 있어 좋지요. 하던 일을 놓고 전철을 타고,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버스터미널을 찾았습니다.



닷새 뒤의 토요일 표라 예매는 쉬웠습니다. 음료수 한 잔을 사들고 대합실 대기의자 쪽으로 갔습니다. 버스 시간을 기다리는 이들이 죽 앉아있습니다. 책을 읽거나, 정면에 켜진 텔레비전의 야구중계를 보거나, 휴대폰을 들여다 보거나. 나도 그들 틈에 끼어앉았습니다.

버스터미널 대합실 의자에 앉으면 마치 어디 먼 데를 금방 떠나기라도 할 듯이 마음이 설레어집니다. 그 어딘가로 떠나고 돌아오는 이들의 표정을 보는 일도 재미있습니다. 그런 그들과 섞여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마치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새로워지지요.



버스를 타러 홈으로 나가는 출구에 쓰레기통이 하나 서 있습니다. 그 곁을 깡총거리며 지나던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풀썩, 과자봉지를 놓쳤네요. 자잘한 과자 부스러기들이 바닥에 흩어졌습니다. 사내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과자를 하나씩 주워 그때마다 일어나 쓰레기 버리는 통에 넣고, 또 줍고, 또 버리고 합니다.

그러더니 일어나 할머니를 부르며 저쪽으로 달려갑니다. 할머니의 도움을 청하려는 모양입니다. 한참만에 아이가 혼자 돌아옵니다. 짐을 두고 올 수는 없을 테지요. 혼자 돌아온 사내아이가 다시 과자부스러기를 줍습니다.



음료수 한 모금을 마시고 났을 때입니다. 이번에는 중년의 부인과 함께 줍습니다. 그 아이의 엄마인 모양입니다. 함께 줍던 엄마인 듯한 분이 일어서더니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출구 문을 밉니다. 엄마가 아닌 모양입니다. 사내아이가 앉은 채 그분을 쳐다보며 꾸벅 인사를 합니다. 그러느라 사내아이가 균형을 잃고 앞으로 굴렀습니다. 나는 웃었고, 그 여자분은 밀던 문을 놓고 달려와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는 나갑니다.

문 위를 쳐다보았습니다. 12번 출구, 거기가 충주행 버스를 타러 나가는 곳입니다. 여자분이 나가고, 떨어진 과자부스러기를 다 주운 사내아이도 제 할머니 곁으로 돌아갔겠지요. 쓰레기를 버리는 통만 우두커니 혼자입니다.



음료수 한 잔을 다 마시고 일어설 때입니다.

울음소리와 함께 좀전의 그 사내아이가 할머니를 따라 출구 쪽으로 갑니다. 뭔가 성에 차지 않아 떼를 쓰고 있는 걸까요. 발을 동동 구르며 할머니 치맛자락을 잡아 당기며 울며 갑니다.

나는 또 웃었습니다. 과자부스러기를 주워담을 때만 해도 어른스럽구나 했는데, 아이는 아이입니다. 저렇게 울고불고 합니다. 할머니가 돌아서서 아이를 치마폭으로 휩쌉니다. 사내아이가 치마폭 안에 폭 몸을 숨기더니 울음소리마저 뚝 끝납니다. 한참 그러구 나서는 사이좋게 12번 출구의 문을 밀고 나갑니다. 충주행 출구니까 충주 가시는 거겠지요.



아이다운 아이가 살고, 할머니다운 할머니가 사시고, 아이가 떨어뜨린 과자를 함께 주워줄 줄 아는 이들이 충주에 산다면 그곳에 얼른 가보고 싶습니다. 그들이 나간 뒤 나는 빈 음료수 컵을 들고 12번 출구로 나가 봅니다. ‘강남-충주’ 행 버스가 거기 서 있습니다. 버스 안에 앉아 있을 사람들을 바라보지만 보일 리 없습니다. 닷새 뒤에 떠날 토요일 버스표를 다시 꺼내봅니다. 얼른 내려가 그들이 사는 땅을 디뎌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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