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씨앗 뿌리는 마음

권영상 2016. 8. 31. 16:02

씨앗 뿌리는 마음

권영상





순무 씨앗을 구하느라 철을 조금 어겼다. 특산지인 강화라면 모르되 그 외의 지역에서 순무씨앗 구하기는 사실 어렵다. 해마다 겪지만 내가 머무는 밤골에서 순무 씨앗을 넣는 적기는 9월초가 오히려 적절하다.

오늘 씨앗 넣을 게 많다. 순무 씨앗도 넣고 무씨며 나머지 자투리땅엔 상추씨도 넣어야 한다. 이 일을 하러 어제 밤골에 내려왔다. 간간히 비가 지나가긴 했지만 폭염이 머물렀던 땅이라 텃밭 흙이 깔깔하다. 엊저녁 내내 물을 충분히 주어 땅을 촉촉이 적셔두었다.



아침에 쟁기를 들고 나와 보니 텃밭 흙 빛깔이 다르다. 검스레하다. 한 움큼 집어 코에 대어본다. 큼큼한 흙내가 난다. 대지란 암만 폭염에 시달려도 알맞게 습도를 머금으면 금방 본래의 상태로 회복된다.

씨앗 넣을 땅을 삽으로 뒤집고는 두둑을 만들었다. 한 두둑씩 두둑을 만들어 씨앗을 넣는 방식을 피했다. 가뭄을 경험한 흙이니까 작은 가뭄에도 밭이 금방 말라버릴 것 같아 아예 큼직하게 두둑을 만들어 두 줄씩 씨앗을 넣기로 했다. 흙덩이를 부수고, 고르고, 호미로 씨 넣을 이랑을 탔다.



장갑을 벗고 손을 씻은 뒤 잘 골라놓은 이랑에 씨를 넣는다. 씨앗을 집는 손은 거칠고 험하다. 내 것을 챙기기 위해 남의 것을 그러당기고 남의 손을 모질게 내치던 손이다. 그 손으로 이 순박한 생명인 순무씨앗을 집어 파종하는 일이란 어찌 보면 참 모순이다. 그러나 또 어찌 보면 그간의 내 죄업에 대한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생명을 생명답게 깨끗이 키워가겠다는 반성의.



그런 의미에서 씨 뿌리는 일은 경건하거나 조심스럽다. 신방에 들어서는 사내의 마음가짐과 뭐가 다를까. 조금 깊게 넣어도 안 되고 얕게 넣어도 발아가 안 되는 게 여린 씨앗이다. 한 곳에 너무 배게 뿌려도 안 되고 너무 성글게 뿌려도 안 된다. 씨앗도 낭비지만 나중에 씨앗이 나오지 않으면 그만큼 애타는 일이 또 없다.



이랑에 씨앗을 놓으며 씨앗 떨어진 자리를 눈여겨본다. 거친 세상을 살며 이처럼 작은 생명에 세심히 눈길을 보낸 적이 없다. 이처럼 정성을 기울여 땀을 쏟았던 적도 없다. 파종이란 노동 중에서도 아주 경건한 노동이다. 씨 뿌리는 순간만은 세속의 욕심이 없다. 군생각이 범접하지 않는다. 오직 탈 없이 돋아나주기를 바라는 집중 외에 더 바랄 것이 없다.

씨앗 뿌린 골에 옷을 입히듯 흙을 덮고, 도닥도닥 두드려주고, 여름에 깎아놓은 잔디를 가져다 덮어준다. 흙이 마르는 걸 막아주기 위해 멀칭을 하는 셈이다.



손바닥만한 텃밭이지만 남은 무 이랑에 무를 심고, 따로 만들어 놓은 가을상추 모판에 상추 씨앗을 뿌린다. 쑥갓도 뿌리고, 잎 푸른 겨자도 뿌린다. 봄엔 신문지를 덮어주었지만 이번엔 순무씨 두둑처럼 잔디를 쪽 고르게 덮었다.



일어나 허리를 한번 쭉 펴고, 물뿌리개로 물을 충분히 준다. 한번으로 부족해 또 한 번 더 주고 물뿌리개를 놓는다. 놓고 다시 생각해보니 좀 부족할 것 같아 또 한 번 물을 날라 주고야 손을 놓는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쟁기며 씨앗봉지를 다 정리하고 수돗물에 손을 씻는다. 손을 씻으면서도 내 마음의 절반이 씨앗 뿌린 텃밭에 가 있다. 저녁을 해 먹고도 몇 번이나 컴컴한 텃밭을 들여다 볼 나를 생각한다. 세상의 무수한 재미치고 씨앗 돋는 걸 들여다보는 일만큼 재미있는 일이란 없다. 이제 그 재미를 누릴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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