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차기 선수의 실축과 그 아픔
권영상
폭염 중인 일요일 아침. 열대야에 시달리며 간신히 몇 시간 눈을 붙였다 깨었다. 선풍기를 틀고 텔레비전을 켰다. 올림픽 축구 결승 승부차기 화면이 떴다. 그러고 보니 이 폭염 중에도 지구 저쪽 편에선 올림픽 축구 결승 게임이 있었다. 독일과 브라질.
본 게임에서 1-1 무승부, 연장전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승부가 나지 않아, 결국 승부차기까지 오게됐다. 더위를 견뎌내기에 이만한 장면이 없을성 싶었다. 나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순서대로 독일과 브라질 키커들이 나와 킥을 했다. 선발된 키커들답게 1, 2, 3, 4번 모두 슛을 날려 골망을 흔들었다. 스코어 4-4. 마지막 각 한 사람씩 남았다.
나는 얼른 리모컨을 집어들었다. 이걸 끝까지 지켜볼 배짱이 없었다.
“남은 5번 키커들에게 몰려오는 부담감이 굉장할 겁니다. 어쩌면 여기에서 승부가 나지 않을까 싶네요.”
해설자는 이 마지막 킥에서 필경 누군가가 실축할 거라는, 단정섞인 해설을 했다. 금메달 획득이 자신의 발에 달려있다는 심리적 부담을 누군가는 견뎌내지 못할 거라는 거다. 그 잔인한 부담이 그걸 시청하는 내게도 몰려왔다.
독일의 마지막 키커 닐스 페테르센이 킥을 하기 위해 축구공을 집어드는 순간 나는 채널을 바꾸었다. 누군가 실축하는 그 딱한 장면을 보는 게 싫었다. 돌린 채널에서 침대광고가 나왔다. 극적인 긴장상태가 사라지자 확실히 마음이 편해졌다.
결과가 나왔음직한 시각에 채널을 되돌렸다. 결과는 4-5. 독일이 실축하고 브라질의 마지막 키커 네이마르가 골을 넣었다. 골을 넣고 감격의 통곡을 하는 네이마르의 모습이 나왔다. 그것은 승리했다는 감격이기 보다 내 눈엔 킥을 하기까지 받은 엄청난 부담에서 해방 됐다는 울음 같았다. 그와 동시에 다시 보여주는 독일의 실축 장면도 나왔다. 실축을 하고 마치 구름위를 걷듯 허방대며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오는 닐스의 아픈 모습.
예전 아버지가 그러셨다.
그때 어머니는 16년간 병명도 모른 채 입원을 지속적으로 반복했다. 그리고 그때 집에는 크고 작은 식구들 또한 많았다. 아버지는 그 모든 비용을 농사일로 감당을 하셔야 했다. 그러니까 모두의 시선은 아버지의 일하시는 손에 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하루하루는 줄을 타듯 위태로우셨다. 아버지가 혹 실축이라도 하신다면 그 순간 아버지는 어머니를 잃으시거나 그 많은 가족을 다 잃게 되실 게 뻔했다. 그때 아버지의 손에 쏠리던 부담은 마치 닐스와 네이마르의 발끝에 얹히던 부담의 무게와 뭐가 다를까.
어떻든 그 때, 아버지는 실축하지 않으셨다. 그 덕분에 어머니는 긴 병고를 마치고 퇴원하여 돌아오셨고, 우리들은 성장하여 다들 자신들의 땅을 찾아 떠났다. 그때 아버지가 받으셨을 심정은 어떠했을까. 어쩌면 네이마르가 골을 넣고 그라운드에 엎드려 통곡을 하던 것처럼 아버지도 사랑방에 혼자 엎드려 밤새워 통곡하셨을지 모른다. 당신의 몸에 얹힌 인생의 무게에서 해방되던 그 허전함으로.
실축하지 않기 위해 아버지가 감당하셔야 했던 고충을 생각한다. 이쯤 나이에 들어서고 보니 그 아픈 고충을 얼마쯤 알겠다. 실축을 하고 허방디디듯 멍한 정신으로 돌아오던 닐스의 걸음걸이에서 나는 그 고충의 크기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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