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내 작품을 말한다

권영상 2016. 8. 7. 21:47

<내 작품을 말한다>



여우에 대한 오해와 편견



여우에 대하여

권영상


아주 옛날, 여우는

숲에서 태어나 마을을 오가며

부지런히 살았다.

그간 자식도 여럿 두었다.

벵골여우, 검은여우, 모래여우, 은여우, 삼손여우, 티베트여우.....

그러면서도

제 임무를 충실히 다 했다.


그 결과 여우는

이 땅에 이런 말을 남겼다.

여우비, 여우볕, 여우사이, 여우오줌풀, 여우콩......

여우에 홀리다,

여우같다,

여우는 같은 덫에 두 번 걸리지 않는다.




여우는 숲에서 살았다. 하지만 숲은 여우가 살아내기에 위험하다. 강자들이 너무 많다. 여우는 그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일부는 평원으로, 또 일부는 산악지대와 툰드라로, 그리고 또 일부는 사막으로 자신을 내몰았다. 그러느라 빈곤한 여우의 식성은 번잡해졌다. 야생의 사냥감이 부족하면 사람이 사는 마을로 내려와 가금이며 달콤한 포도, 인가 주변에 서식하는 쥐와 작은 열매를 찾았다.



이러한 번잡한 습성은 인류를 닮았다. 인류의 탐욕은 끝내 여우의 영토를 빼앗기 시작했고, 같은 영토 안에서 여우는 인간과 오랜 세월 끊임없이 충돌했다.

여우가 닭장 속의 닭을 훔쳐갈 때마다 인간은 여우에게 비열한 야유를 퍼부었다. 교활한 놈 같으니라구! 아니 비겁한 놈! 아니 간교한 놈! 아니 앙큼한 놈! 아니 세상에서 가장 간사한 놈! 그것도 모자라 때로는 여우를 슬쩍 본 것만으로도 ‘재수 없다’며 침을 뱉았고, ‘요물여우’라며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여우를 비난했다. 그뿐인가 진정 교활하고 간교한 인간을 비유할 때 ‘여우같다’는 말로 여우를 모욕했다.


 

그런 온갖 욕설과 모욕과 편견과 비난을 받으면서도 여우가 여우로서 살아남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에겐 자식이 많다. 적게는 대여섯이지만 많게는 열이다. 7킬로그램 밖에 안 되는 작은 체구의 여우가 감당하기엔 자식이란 너무 힘에 버겁다. 무려 네다섯 달을 먹이고, 잠재우고, 곁을 지켜주어야 한다. 냉혹한 자연 속에서 부모의 임무를 다 해내야하는 여우의 인생은 고단하다.



여우가 사냥을 한다지만 그에겐 맹수와 같은 강한 턱이 없다. 섬뜩한 이빨도 없다. 뾰족한 뿔도, 강한 뒷발굽도, 상대를 단번에 제압할 이렇다 할 발톱도 없다. 놀라운 주파력을 가졌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있다면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잰걸음밖에. 그러면 여우는 무엇으로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가. 잔머리다. 여우의 상대는 인간이며 또한 인간이 기르는 옛 동족인 개다. 이 얼마나 치명적인 강호의 숙적인가. 여우는 영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무렵부터다. 여우는 생존을 위해 더욱 영리해졌으나 인간은 여우의 삶을 일컬어 ‘교활하다’고 했다. 여우에겐 치욕스런 야유다. 여우를 향한 이 치욕스런 인류의 야유에 대해 늦었지만 나는 지금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나는 자식 많았던 아버지들이 타자에게 보이시던 비굴함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았던 고향 인근에도 여우처럼 이쪽과 저쪽을 사시던 분이 있었다. 내 고향은 철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은 농촌이었고, 그 너머는 어촌이었다.

일곱 자식에 비해 턱없이 농토가 작았던 그분은 농사철엔 호미를 들었고, 여름 한철엔 바다에 나가 오징엇배를 탔다. 바닷일을 업신여기던 그 때, 그분은 농경민들의 야유와 손가락질을 뒤로 하고 바다에 나갔다. 그분에겐 그분이 감당해야할 가족이 있었다. 그런 그분이 어느 날, 하루치 임금을 못 받자, 일곱 자식의 입에 맞게 일곱 마리의 오징어를 숨겨나오다 뱃머리에 쓰러져 그만 불구가 되었다. 그 일은 남들 눈에 비굴해 보일지 모르나 어쩔 수 없는 생존이었다.



“참 어리석은 사람!”

그분에게 그런 말이 따라다녔지만 그분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분은 생계를 위해 호미를 들었으나 그것이 부족하자 불법으로 이발을 하셨고, 잡다한 소목 일을 하셨다. 밤이면 갯물에 나가 가족의 입만큼 붕어를 잡았고, 개복숭아를 따도 가족의 수만큼 땀을 흘리며 땄다.

그분은 여우처럼 그분에게 주어진 생애를 고단하게 살았다. 세상에 그분이 못할 일은 없었다. 만약 여우에게 물려받은 열 마지기의 기름진 옥토가 있고, 훌륭한 저택이 있고, 남들 다 부러워하는 권력이 있고, 늠름한 체격과 풍경을 사랑하는 교양과 풍족하게 살아온 유전자가 있었다면, 그러고도 여우는 교활한 삶을 살았을까.



어쨌건 여우는 남들이 뭐라거나 말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확고한 자신의 인생을 살았다. 훗날 호사가들의 ‘여우야말로 교활하다’는 평가는 여우의 생애를 외면한 모욕이며 여우에 대한 편견과 야유와 턱없는 비난이다.

교활하다면 오히려 그들이 교활하다. 오랫동안 인류는 여우가 살던 터전을 빼앗아가고 있다. 여우가 거닐며 사색하던 숲이며 평원이며 여우가 고뇌하던 사막까지 빼앗고 있다. 그리고 끝내 여우는 인간의 총구 앞에서 절멸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동북아의 이 조그만 땅에서 여우가 사라진지는 벌써 오래다. 대체 누가 여우를 교활하다 말하는가. 여우가 절멸하기 전에 누군가 여우의 평전을 다시 써주기를 기대한다. 오호, 여우의 생애가 실로 절박하고 절박하도다!


<동시마중 2016년 8.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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