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아내가 집에 없는 밤

권영상 2012. 6. 21. 13:13

아내가 집에 없는 밤

권 영 상

 

 

 

“여기 좀 들여다 봐요.”

출근을 하려는데 아내가 나를 부른다.

내가 다가가자 아내는 냉장고문을 열어 이거는 밥이고, 이거는 반찬이고, 야채통엔 뭐뭐가 들어있고, 하면서 일장 설명이다.

“아유, 당신 없다고 밥 굶겠어. 그러니 걱정말고 잘 다녀와.”

나는 호기롭게 큰소리를 치고는 집을 나섰다.

 

아내가 잠시 강릉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그 바람에 아내에게 걱정이 생겼다. 내 밥이다. 곰국 말고 미역국도 끓여놓았다며 번갈아 먹으랬다. 아내는 내 밥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각별하다. 그러나 나는 좀 다르다. 먹는 거야 집밖에 나가면 흔한 게 음식점이다. 전화 한 통화면 순식간에 음식이 배달되어 온다. 그러니 밥 굶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은 없다.

 

오히려 나 혼자의 시간을 누려본다는 일로 나는 설렌다.

퇴근을 하고 돌아와 빈 집이 주는 공간감을 느껴본다는 건 싫지 않다.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려도 보고, 거실에 번듯이 누워도 보고, 혼자 노래라도 싱겁게 불러보고, 그러다가 커피를 한잔 타 들고 라디오를 켜본다. 쓰는 일 없이 피아노 위에 놓아둔 라디오가 있다. 스위치를 넣고 여기저기 주파수를 맞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단파방송의 음악을 듣는 일도 좋다. 오랫동안 마음만 먹어왔던 일을 하며 고요한 시간을 누려볼 생각에 나는 들떴다.

 

걱정 말아요, 그 말을 하고 나는 출근을 했다.

이제부터 나는 빗방울처럼 즐겁다. 출근을 해서도 오늘 이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그 흥분에 빠졌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폼나게 술이나 마셔볼까. 혼자 극장을 찾아가 아무거나 영화 한 편 즐겨볼까. 아니면 전시회에 찾아가 그림이나 보고 가? 그러다가 한정없이 퇴근을 좀 늦추어보자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허겁지겁 출근을 하고, 저녁밥 시간에 맞추어 허겁지겁 가방을 싸들고 돌아가는 일을 나는 몇 십 년이나 했던가.

 

결국 나는 퇴근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퇴근을 했다. 그러니까 내 일상과 다른 시간에 퇴근을 하며 퇴근길에 있는 베트남음식점에 들러 닭가슴살 요리 팃틴투를 먹고, 와인 씸도 한 잔 걸치고 집에 돌아왔다. 나는 대담해지고 엉뚱해지기 시작했다. 누구의 간섭도 없는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시간을 써보자는 심사가 일었다.

 

빈 집에 들어와 불을 켰다.

소파며 텔레비전이며 컴퓨터며 피아노며 옷장들이 정직하게 제 자리에 있다. 그러나 제 자리에 놓여있지 않은 게 있다. 아내와 나다. 아내는 지금 집에 없다. 그리고 내가 있다. 내가 있기는 하지만 아내 말에 고분고분하는 어제의 내가 아닌 일탈의 내가 서 있다. 몇 시간만에 내가 이렇게 대담해졌다.

 

나는 습관대로 텔레비전 리모컨을 찾아들었다.

그러다가 리모컨을 던졌다. 모처럼의 이 고요한 시간을 텔레비전에게 바치고 싶지 않았다. 거실에 앉아 마음 놓고 담배 한 대를 피웠다. 참 얼마만에 누려보는 행복인가. 방안을 타고 흐르는 담배 연기가 멋있다. 갑자기 야한 영화 한편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리모컨을 다시 집어들었다.

 

그 때다.

휴대폰이 울렸다. 길 건너 친구다. 술 한 잔 하잖다. 양에 차지 않았던 씸 때문에 나는 서슴없이 집을 나섰다. 늦도록 술을 마시고 돌아왔다. 아내가 없어 그런지 약간 무섬증이 돈다. 텔레비전을 켰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텔레비전이 혼자 지지거린다.

부랴부랴 출근을 서두른다. 아내가 없는 밤이 이렇게 끝난다. 야한 영화는 언제 또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