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고단한 인생의 무게

권영상 2013. 9. 10. 17:08

 

 

고단한 인생의 무게

권영상

 

 

 

 

 

아침 7시 10분. 비 끝이라선지 날씨가 차다.

간밤 기상예보로는 강원도 산간지방에 눈이 내린다고 했다. 머지않아 이 도시에도 홀연히 눈이 내릴지 모른다. 서늘한 출근길을 걸어 3호선 전철에 올랐다. 다행히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읽던 책을 꺼냈다.

 

 

 

전철이 한 정거장을 달려 교대역에 섰을 때다.

점퍼를 입은 노인 한분이 신문 한 묶음을 안고 타더니 출입문 곁에 재빠르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선반 위의 신문들을 걷었다. 승객들이 읽고난 신문을 모으는 분 같았다. 키가 작았다.

나는 책을 폈다. 그런데 그분의 모습이 나를 책에서 눈을 떼게 하였다. 내 앞에 바싹 다가왔다. 내 머리 위 선반에 신문이 있는 모양이었다. 키 작은 그분이 선반 위로 손을 뻗어올렸다. 짐작컨대 신문이 집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 무릎 사이에 다리를 밀어넣고 매달리듯 몸을 세웠다. 그러느라 그분의 두꺼운 겨울 점퍼가 내 얼굴을 부볐다.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선반에 밀어올린 그 분의 손이 간신히 신문을 잡아챘다. 그러더니 이번엔 사람들 사이를 재빠르게 비집고 건너편 선반 쪽으로 갔다. 거기서도 노인은 발뒤꿈치를 들어올려 선반 위의 신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신문은 그 너머 깊숙이 놓여 있었다. 노인은 앉은 이의 사정쯤은 아랑곳없이 오직 신문을 잡기 위해 애를 썼다.

한참만에 노인이 선반의 뚫린 구멍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신문을 앞으로 밀어냈다. 그런 방식으로 노인은 선반 위의 신문을 걷으며 이웃칸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요즘 출근길 전철엔 예닐곱 명씩 때로는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보고난 신문을 걷으며 통로를 지나간다. 그 일은 주로 남자 노인분들이 했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여자분들도 이에 합세했다. 그러더니 또 언제부턴가 삼십대 젊은이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그런 젊은이들을 봤을 땐 좀 힘찬 일을 하지, 했었다. 그러다가 그 생각마저 거두었다. 생각같이 좀 힘찬 일거리를 얻을 수 없는 현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전철 안의 일을 보면 전철 바깥세상을 짐작할 수 있다. 사는 일이 어느 때보다 힘들어졌다는 뜻이다.

전철이 금호역을 출발할 때쯤이다.

 

 

 

좀전의 그 점퍼를 입은 노인이 그리 많지 않은 신문을 단촐하게 한쪽 팔에 안고 돌아왔다. 무릎이 튀어나온 곤색 바지에, 모자를 쓴 노인이 놓아두고 간 신문 묶음 앞에 앉았다. 노인은 출입문에 등을 돌리고 앉아 이미 모아둔 신문 묶음을 풀어 새로 걷어온 신문을 빠른 손놀림으로 묶었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다들 눈을 감고 있었고, 서 있는 이들 또한 서 있는 대로 무언가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나는 다시 책에 눈을 두었다.

 

 

그때였다.

에이쿠! 노인이 소리쳤다. 거의 비명에 가까운 큰 소리였다. 나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신문 묶음을 안고 일어서느라 외친 노인의 비명이었다. 노인도 놀랐는지 얼핏 우리를 봤다. 승객들도 일제히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노인은 비명을 지른 입을 닫았다. 그 순간 하얀 틀니가 창백하게 보이다 사라졌다. 이윽고 약수역에 전철이 섰다. 노인은 그 얼마 안 되는 양의 신문묶음을 안고 내렸다.

 

 

노인이 지르던 비명은 무엇일까.

그 얼마 안 되는 신문의 무게 때문에 소리친 비명만은 아닌 듯 했다. 노인에게 짐 지워진 고단한 삶의 무게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직도 누군가를 부양해야할 힘겨운 짐의 무게가 그 분의 입에서 그런 비명을 튀어나오게 만들었을 것 같았다.

충무로에서 내려 4호선으로 갈아타는 내내 그 생각이 나를 짓눌렀다. 그건 스산한 겨울이 오고 있다는 간밤의 기상예보 때문만은 아닌듯 하다. 사는 일이 내게도 버겁다.

 

(교차로신문 2011년 11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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