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꿈을 안겨주고 간 아랫마을 경섭이 아저씨

권영상 2013. 6. 17. 14:29

 

꿈을 안겨주고 간 아랫마을 경섭이 아저씨

권영상

 

 

 

 

오, 어쩌면 이리도 모든 것이

멀리 흘러가 버렸을까.

지금 반짝이고 있는 저 별도

이미 4년 전에 죽어 버린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강을 따라가는 보트에서

근심스런 무슨 이야기가

들리는 듯 하다.

집에서

시계 치는 소리가 울린다.

어느 집일까.

이 비좁은 나의 마을에서 뛰쳐나와

넓은 하늘 아래로 나가고 싶다.

그리고 기도 드리고 싶다.

 

  

 

 

구언이와 나는 거기까지 읽었다.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그 글은 무언지도 모르게 우리의 마음으로 다가왔다. 마당 안으로 밀려온 안개가 라일락나무를 감싸듯 그 글은 우리들의 마음을 휩싸 안았다.

구언이는 구언이 대로 나는 나대로 그 글을 외기 시작했다.

 

 

 

이 글은 내 아홉 번째 동화집 <개미꼬비>(문원출판사)에 수록된 단편 동화들 중의 ‘남종이 아저씨네 포도밭’ 일부이다.

이 글 속의 남종이 아저씨는 실제로 우리 ‘아랫마을’에 와 살다간 인물이다. 그분의 이름은 경섭씨다. 나는 그분을 ‘경섭이 아저씨’라 불렀다. 우리 아랫마을은 촌수로 형이 아닌 분은 3촌 5촌 7촌은 물론 그외의 사람들도 무조건 ‘아저씨’라 불렀다. 미혼이든 아니든 다 그렇게 간편한 호칭을 썼다. 그런 관계로 총각이었던 경섭씨마저도 우리에겐 경섭이 아저씨였다.

그는 키가 컸고, 살집이 알맞았다. 얼굴색이 붉었고, 이목구비가 분명했으며 쌍꺼풀 눈을 가진 호남형이었다. 우리 아랫마을 사람들 몸에서 구릿한 냄새가 난다면 그의 몸에선 어디서도 맡아보지 못한 꽃향수 냄새가 났다. 우리 아랫마을 사람들이 구닥다리 외모라면 그는 모던한 스타일이었다.

그는 붉은 벽돌집을 짓기 전까지 자전거를 타고 읍내에서 오르내렸다.

 

 

 

 

그분이 우리 아랫마을에 나타난 게 1972년 무렵이지 싶다.

그때 그분의 나이 대략 20대 후반이었다. 대학을 마치고 금융계에 일이 년 근무를 하다가 왔으니 그쯤 되었다. 그때 내 나이는 17살.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고교 진학을 포기한 채 3년을 허송세월하고 있었다. 열일곱 살 먹은 나는 그분이 서울서 공부를 했는지, 금융계에 근무했는지 전혀 몰랐다. 물론 그분도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우리 아랫마을 뒷뜰엔 대밭골집 너른 밭이 있었다. 대발골집은 초당에서도 굵직한 부자였다. 오늘날 허균의 생가로 알려지고 있는 고가가 바로 그 대밭골집이었다. 그 집 젊은 주인은 어쩌자고 운수업에 매달리다 그만 재산을 송두리째 날렸다.

그때에 우리 아랫마을 너른 땅도 그 대밭골집 땅이었는데, 경섭이 아저씨가 그 땅을 사서 우리 마을로 내려왔다. ‘내 친구 돈만이’ 집이 그 밭의 일부였는데 돈만이네도 아버지를 잃고나자 마을을 떠났다.

경섭이 아저씨는 떠나간 돈만이 집을 헐고 그 위에 붉은 벽돌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 너른 밭에 포도 묘목을 심어 포도밭을 만들었다.

그때 우리는 그분의 그런 농법에 경악했다. 그 시절만 해도 농사를 짓는다 하면 논에는 벼를, 밭에는 감자나 보리, 밀 콩을 심어먹고 살았다. 그런데 그 멀쩡한 밭에 포도나 따먹을 포도밭을 만들겠다니. 더구나 서울서 대학까지 공부한 사람이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하는데 대해 다들 놀랐다.

 

 

 

 

어느 날 경섭이 아저씨가 작은 트럭을 몰고 나타났다.

그 트럭 안에는 포도나무 묘목이 실려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포도 묘목 이름을 또렷이 기억한다. 골든 델리셔스와 엘리자베스 퀸이다.

그분의 요청으로 나는 그분과 함께 그의 너른 밭에 포도묘목을 심었다. 열일곱 나이에 학교에 못 가고 멀쩡한 날에 그분을 도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어머니의 병환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봄부터 시내 병원에 입원하셨다. 그 후로 거의 15,6년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셨는데 그 여파가 내게 닥쳐왔다. 나는 그만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왔다.

말이 좋아 농사일을 도왔지 실은 술이나 먹고 담배나 피며 세상에 대해 불평불만을 터뜨리며 살았다.

그 무렵, 나는 경포대해수욕장에서 사귄 넝마주이 친구에 빠졌고, 그와 거의 매양 술이나 마시며 퇴폐적으로 살았다. 그러다가 넝마주이 친구의 자살로 나마저 외톨이가 되어 살아갈 때였다. 그렇게 3년을 어영부영 슬피 살 때였다.

 

 

 

 

나는 그런 좌절의 고비에서 경섭이 아저씨를 만났다. 그분은 내게 색다른 분이었다. 그는 말법이 매우 민주적이었고, 그가 하는 말은 논리적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고 언제나 조용조용했으며, 어린 나의 마음을 헤아려줄 줄 알았다. 무엇보다 그는 나의 삶을 이해하려 하였다.

그것은 분명 보수적인 우리 아랫마을 사람들과는 달랐다.

“삽질을 잘 하는구나.”

경섭이 아저씨는 묘목 구덩이를 파는 나를 보면 그런 말을 즐겨 했다.

이 정도 삽질이라면 젖먹이 애들도 한다. 그런데도 그는 일이 끝나면 내게 이런 식의 말을 꼭 한 마디씩 해주었다.

“거름을 주어도 머리를 써서 주는구나.”

거름을 주는 걸 보면 그 때에도 놓치지 않고 칭찬을 했다.

그는 그 넓은 밭 일을 할 때에도 남에게 일을 시키고 저는 놀지 않았다. 언제나 함께 일했다. 그는 모던한 외모와 달리 매우 성실했으며 겸손했다.

우리가 손에 거름을 묻히면 그도 손에 거름을 묻혔고, 쉬면 곁에 앉아 함께 쉬었다.

그러면서도 신기한 일은 그는 내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이야기며, 은행에 근무하던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진학도 못하고 사는 나의 자존심을 건들어선 안 된다는 걸 분명히 알고 나를 대한 듯 했다. 내가 그분과 같이 살았던 4,5년 동안 나는 그분이 서울에서 지냈던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그 밭의 묘목도 다 심고 난 어느 가을이었다.

그는 잘 지어놓은 붉은벽돌집 앞 라일락나무 아래로 나를 불렀다.

“일하는 걸 쭉 지켜봤는데 정말 잘 하는구나.”

그는 다가간 내게 그 말을 했다.

“그렇게 다시 공부를 시작하렴.”

그러며 그 새로 지은 흙벽돌집 열쇠를 내게 내밀었다.

“연탄 백 장을 넣어놓았다. 우리 집에서 고입 시험공부를 해라.”

그러고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가버렸다.

그분의 붉은 벽돌집은 현대식 건물이었다.

넓은 거실과 경섭이 아저씨가 쓰는 방 두 개와 부엌과 샤워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나는 가끔 그 집을 들락이며 이런 집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는 내게 그 집을 맡기신 거였다.

우리 농가와 전혀 다른 그의 붉은 벽돌집은 그날부터 열일곱 살 내 차지가 되었다. 거기엔 또 한 대의 파란 자전거가 있었고, 그분의 방엔 그가 공부하는 책상이 있었고, 책꽂이엔 그분이 읽고 있음직한 원서들과 시집과 몇 권의 소설과 그리고 원예와 건축에 관한 책들이 있었다.

 

 

시계 치는 소리가 울린다.

어느 집일까.

이 비좁은 나의 마을에서 뛰쳐나와

넓은 하늘 아래로 나가고 싶다.

 

 

이 시도 그때 그분의 책꽂이에 꽂힌 책 중에서 왼 시다.

라이너마리아 릴케의 시 ‘비애’.

나는 그 무렵 이 시를 외면서 이 비좁은 ‘아랫마을’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생전 처음으로 하였다. 그리고 17살의 눈 내리던 밤, 처음으로 지구의 반대켠에 산다는 릴케라는 시인을 알면서 쿵쿵 뛰는 가슴을 느꼈다.

“집은 작되 마당이 넓은 집이 아름답다.”

이 글귀도 그때 그분이 가지고 있는 <원예와 건축>이라는 책에서 읽었다. 그 아름다운 겨울 동안 나는 마당이 큰 집을 가지고 싶다는 꿈을 처음으로 꾸었다. 그 배경에는 물론 경섭이 아저씨의 붉은 벽돌집과 넓은 포도밭이 있었다. 집 둘레엔 담장이나 철조망 대신 장미 울타리를 만들겠다며 나는 그 시절 미래의 나의 집을 몇 번이나 그려보곤 했었다.

 

 

 

 

 

그해 나는 시험공부를 마치고, 꽤 괜찮은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3년 동안 아무 꿈도 없이 술이나 먹고 불평 불만만 하던 내가 드디어 18살을 먹은 어느 눈 내리던 12월의 새벽, 라디오에서 전하는 합격 소식을 들었다. 병석에 누워계신 어머니도 기뻐하셨고, 어머니 우환에 농토를 차례차례 처분해 가시던 아버지도 내심 나의 고입 진학을 기뻐하셨다.

그날 아침 경섭이 아저씨가 달려왔다.

“길을 잃을 때마다 이걸 보렴.”

내 합격 소식을 듣고 온 경섭이 아저씨가 선물을 내밀었다. 그분의 손바닥에 나침반이 들려 있었다.

“아저씨.......”

내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기에 나는 3년 동안이나 길을 잃고 헤매며 살았다. 그렇게 비틀대며 걸어가고 있는 내 뒷모습을  경섭이 아저씨가 눈 여겨 보았던 것이다.

나는 나침반을 받아 쥐며 내가 갈 길의 방향을 어렴풋이 정했다.

그날 이후에도 경섭이 아저씨는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 그 붉은 벽돌집을 내게 맡기셨다. 나는 그 동안 그분의 책꽂이에 꽂힌 시와 소설을 밤새워 읽고 또 읽었다.

밤이 깊으면 연탄 화덕의 불을 갈면서 18살 나이에 혼자 내 집을 가진 이 사치로움에 감격했다. 십여 명 식구가 북적대며 살던 내게 혼자 차지하는 집을 주시다니! 멋있게 생긴 책상과 책꽂이에 가득한 책들과 그리고 경섭이 아저씨의 얼굴이 사진틀에 걸려 있는 이 소중한 방을 다섯 달 동안이나 내가 차지할 수 있었다니!

 

  

 

학업을 중단한 15. 16. 17살, 그 무렵 나는 불행했다. 입원한 어머니 때문에 집안이 늘 텅텅 비었다는 것도 내게는 불행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뒷바라지를 하시는 아버지의 험난한 모습도 내겐 불행이었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어머니를 볼 때가 자주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는 일이 싫었다.

‘스무 살 까지만 살고 말 테다.’

나는 늘 그런 두려움에 떨며 십대를 살았다.

그런 내게 경섭이 아저씨는 도저히 내가 다가갈 수 없었던 ‘희망’과 ‘꿈’이라는 것을 1972년 겨울 내 품에 안겨주셨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고 2,3년 뒤였다.

무슨 일이 있어선지 경섭이 아저씨는 포도밭을 다른 이에게 넘기고 서울로 갔다.

그후, 나는 대학을 마치고, 결혼을 하고, 서울에 와 직장을 잡아 살다가 우연히 그분의 소식을 알게 됐다. 그때 그분은 동부그룹의 모 계열사 사장으로 있었다.

그분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 대신 그분을 위해 “남종이 아저씨의 포도밭”이라는 동화를 써서 발표를 했다.

 

 

 

 

 

“자네는 이렇게 포도밭 주인이 되지 않았는가.”

구언이가 우물쭈물하는 내 손을 꽉 잡았다. 구언이의 손이 따스했다. 나는 구언이를 위해 향기 좋은 포도를 따와 구언이 앞에 내밀었다.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은 구언이가 지긋이 눈을 감고 나더니 말했다.

“옛날 남종이 아저씨네 포도맛 그대로네.”

“나도 그 맛을 생각하며 포도맛을 길들이고 있다네.”

우리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오래 전, 우리 곁을 떠나간 남종이 아저씨를 떠올렸다.

 

 

 

오, 어쩌면 이리도 모든 것이

멀리 흘러가 버렸을까.

 

 

구언이가 그 시를 다시 외었다.

그 순간, 남종이 아저씨의 잊혀진 발걸음이 언뜻 포도밭 속을 조용히 지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세월이 흘러 나도 모르게 많은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그 때의 경섭이 아저씨처럼 안성 산비탈에 붉은 벽돌집을 닮은 조그마한 집을 하나 마련하였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거기 어느 농가에 있을 나를 닮은 소년에게 경섭이 아저씨가 내게 꿈을 주셨듯 꿈을 넘겨주는 일이다.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