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어린 시절 내 친구 돈만이네 집

권영상 2013. 6. 11. 15:04

 

어린 시절 내 친구 돈만이네 집

권영상

 

 

 

 

 

 

어릴 적 나는 오리와 가끔 빈병을 들고 논에 나가 벼메뚜기를 잡았습니다. 벼메뚜기를 잡아 볶으면 제법 맛있는 간식거리가 됐거든요. 간식이 전혀 없던 그 시절에는 벼메뚜기도 귀한 먹거리였지요. 그러나 우리 집은 그런대로 살았기 때문에 벼메뚜기를 잡으면 닭들에게 주곤 했습니다. 그러니 벼메뚜기를 잡아도 이악스럽게 잡지 않았습니다.

“오리한테 잡힐라. 저리 도망가거라.”

벼메뚜기 잡기가 싫으면 나는 오리가 못 잡게 벼포기를 헤치며 훼방을 놓았습니다.

그럴 때에 벼메뚜기를 꼬누던 오리가 얼굴을 붉히며 나를 노려봤습니다. 그러더니 벼메뚜기를 잡아넣던 병을 내게로 홱 던졌습니다. 날아온 병은 내 왼쪽 눈썹 위를 벼락같이 때렸습니다. 얼굴을 감싸 쥐고 주저앉은 손 사이로 피가 흘렀습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주먹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때입니다.

“너는 닭 주려고 잡지만 나는 내 동생 먹이려고 잡는다는 거 알기나 해!”

오리가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비록 그때 내 나이가 적기는 했지만 그 말을 듣고 더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오리네 집은 가난했습니다. 가끔 오리네 집에 가면 어디선가 마른 누룽지를 얻어와 그걸 밥 대신 불려 먹는 걸 보았습니다.

그렇게 살던 오리는 우리 마을을 떠나 멀리 이사를 갔습니다.

나중 오리를 만난다면 이 동시집을 그에게 선물로 주고 싶습니다.

 

 

 

이 글은 내 열 번째인가 열한 번째인가 동시집 <실끝을 따라가면 뭐가 나오지>(국민서관)의 머리말에 붙은 글의 일부이다.

여기에 나오는 ‘오리’는 우리 ‘아랫마을’에서 같이 살았던 내 친구다. 우리 집 뒤 솔밭길이 끝나는 곳에 움펑 빠진 자리가 있는데 거기에 그의 집이 있었다. 부엌 하나에 방 두 칸짜리 아주 조고마한 초가였다. 북쪽에선 사철 쉬지 않고 바람이 불었는데 그걸 막으려고 뒤란엔 엉성한 사철나무 울타리를 세워두었다.

 

 

 

 

내 친구 오리의 이름은 최돈만.

오리처럼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걷는 대서 붙여진 별명이다. 나보다 서너 살 위다.

그에겐 세 명의 늦게까지 코를 흘리는 여동생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키가 작고 몸이 호리호리한 분이다. 경포 호수 건너 허부잣집에서 머슴으로 일했고, 그의 어머니는 키가 컸고, 머리에 인 함지박을 두 손으로 잡고 걸을 때면 저고리 밑으로 젖이 온통 드러나 흔들거렸다.

 

 

“돈만아, 놀자!”

나와 내 친구들은 겨울이 오면 돈만이 집에 자주 놀러갔다.

돈만이는 아까도 말했지만 나보다 서너 살 많았다. 또 다른 내 친구도 역시 나보다 두어 살 많았고, 그리고 또 다른 내 동네 친구는 나보다 두 살 적었다. 그런데도 그 시절 우리는 서로 친구였고, 지금처럼 나이를 밝혀 형, 아우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그냥 ‘야!’, ‘너!’, ‘응.’의 ‘야자’ 식이었다. 그래도 누구 하나 존대를 쓰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주먹질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너 살 위인 돈만이를 부를 때도 ‘돈만아!’ 그렇게 불렀다.

 

 

 

 

돈만이 집이 놀기에 좋은 건 돈만이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신다는 거다. 겨울철이면 잠깐 잠깐 집에 계시고 새경을 받는 동짓날부터는 경포 건너 허부잣집에 가 계셨다.

어린 시절, 엄한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신다는 건 해방이었다.

우리는 대여섯만 모이면 돈만이집 손바닥만한 마당에서 축구를 했다. 축구공이라곤 바람이 다 빠진 가죽공이거나, 그마저 찢어지면 그 안에 짚을 채워넣어 만든 공이었다.

사람이 모자라면 돈만이 여동생 돈미를 억지로 끌어들였다. 돈미는 치마를 휩싸쥐고 공을 따라다녔다. 그러다가도 안방에서 제 동생 우는 소리가 나면 달려가 동생을 얼렀다.

 

 

  

 

“돈미야, 빨리 나와. 너 때문에 지고 있단 말야!”

그러며 안방을 향해 소리치면 돈미는 동생을 업고 문지방을 넘어 나왔다.

“아니! 알 업고 어델 간대!”

돈만이 엄마가 냅다 소리치면 돈미는 주둥이를 내밀고 다시 들어갔다. 그러면 자연히 우리들의 축구시합도 머쓱하게 끝이 나고만다.

“자치기 하자!”

누가 그 머쓱해진 분위기를 깬다.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분위기가 살아났다.

그 말 떨어지기 무섭게 돈만이는 즈네집 헛간에 숨겨놓은 자치기를 꺼내왔다. 혹 자치기가 없으면 낫으로 앵두나무 가지를 찍어 자치기에 쓰이는 메뚜기를 만들었다. 앵두나무 메뚜기는 단단하고 야물어 웬만한 막대에 맞아도 부러지지 않았다.

 

 

 

 

돈만이네 마당은 우리 ‘아랫마을’에서 제일 작다. 고양이 이마 반쪽만 하다. 그렇게 작아도 돈만이네 마당은 우리 ‘아랫마을’에서 또 제일 크다. 참 크기도 크다. 아마 한 3천 평은 될 거다. 그것은 돈만이네만 집 앞 담장이 없기 때문이다. 마당 둘레엔 담장 대신 닥나무 한 그루와 앵두나무 한 그루가 울타리의 전부다. 그 외의 곳은 다 세상과 열려있다. 그래서 마당 너머로 펼쳐진 수천 평 빈 밭이 다 그의 마당이나 진배없었다.

축구공이 빈 밭으로 날아가면 거기서도 축구는 계속 이어졌고, 자치기의 메뚜기가 마당 밖으로 날아가도 아무렇지도 않게 또 거기서 게임은 계속되었다.

우리는 날아가는 메뚜기를 쫓아 파랗게 돋는 보리밭이나 배추를 거두워 들인 빈 들판을 돈만이네 마당인 양 휘삼고 다녔다.

그 시절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우리들이었지만 세상에 돈만이네 마당만큼 큰 운동장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싸락눈이 오면 싸락눈을 맞으며, 북쪽 시커먼 동지바람이 불면 그 동지바람을 맞으며 축구를 하고 자치기를 했다.

 

 

 

 

“일루 와 즘슴 먹고 놀아라!”

그렇게 노는데도 돈만이 어머니는 뭐가 좋은지 점심 때가 되면 가끔 우리를 불러 점심을 먹였다. 돈만이 아버지가 받아오시는 몇 가마 안 되는 새경은 방웃목에 쌓아놓고, 늘 국수 아니면 풀죽을 먹었다. 우리가 먹었던 점심도 돈만이 엄마가 해주신 수제비나 아니면 비행장 공군부대에서 얻어온 누룽지를 불려만든 누룽지죽이었다.

그렇게 잘 노는 게 뭐가 좋다고, 우리 아랫마을에서도 제일 가난한 돈만이 엄마는 우리 아랫마을의 제일 부자인 양 끼니를 때워주시곤 했다.

 

 

  

 

어떤 날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돈만이 집을 지나다 보면 쳇바퀴 한 짐이 봉당에 놓여있는 걸 볼 때가 있다.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장사를 하러 다닐 시간이 부족하다 싶은 체장수가 돈만이집에서 하룻밤 잘 모양이다.

체장수들은 대개 여자들이어서 바깥남자가 있는 집보다는 돈만이 엄마 혼자 자는 돈만이 집이 편했기 때문이다.

돈만이 집은 손톱만치 작은 방이 두 개다. 그리고 식구만도 다섯이다. 그 비좁은 방에 체장수나 또 가끔 오는 꿀장수가 끼어잘 자리가 없다. 그랬어도 돈만이 엄마는 비좁은 자리를 체장수를 위해 내어주었다.

 

 

 

 

 

 

겨울이면 한 길씩 눈이 내려 옴짝달싹도 못한 채 눈만 바라보며 사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면 갑갑하다. 갑갑한 마음에 처마 끝 고드름을 하나하나 부러뜨리다 보면 또 밤이 온다.

“여여영상아, 우우우리 집에 와.”

그럴 때에 돈만이가 우리 집 마당으로 걸어들어와 나를 부른다.

“왜?”

“우우우리 집 가 참새 잡자.”

돈만이는 손으로 지붕을 가리켰다.

아, 그렇다. 참새를 잡자.

나는 후래쉬를 찾아들고, 또 참새를 잡아넣을 밀가루 부대자루를 들고 돈만이 집으로 향한다. 푹푹 빠지는 눈 위로 굴러굴러 참새를 잡으러 가는 일은 즐겁다.

참새잡기에 딱 좋은 집이 돈만이네 집이다. 돈만이네 집은 오막살이집이라 목마를 타면 지붕 처마에 손이 닿는다. 처마 밑 이엉 속에는 참새들이 구멍을 뚫고 들어가 알을 낳고 살았다.

 

 

 

“빨리 와라.”

나보다 키 큰 친구들이 먼저 와 있다.

나이 많은 친구 중 누가 목마를 태우면 목마를 탄 누군가는 참새집 구멍이 후래쉬불을 비추고 손을 들이밀어 참새를 잡았다.

“영상이 네가 해. 네가 제일 작으니까.”

그랬지만 겁 많은 나는 그게 무서웠다. 그 시커먼 구멍에 손을 집어넣어 가슴 호독거리는 참새를 붙잡다니! 나 같이 간뎅이가 작은 애는 어림없다.

“뱀 나오면 어떡하려고!”

나는 그런 핑계로 늘 물러섰다.

누구 말인지 몰라도 참새집 구멍에 구렁이가 들어가 산다는 말도 있기는 있었다.

손을 안 집어넣으려면 밀가루 부대 자루를 벌려 참새구멍에 대고 지붕 위를 툭툭 치면 참새가 밀가루 부대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그랬지만 어린 우리들은 하는 족족 허탕이었다. 참새구멍에 손을 넣었다가 바둥대는 참새에 놀라 목마에서 떨어져 머리를 깬 아이도 있었다.

 

 

 

 

어떻든 오막살이 돈만이네 집엔 돈만이 식구도 살고, 체장수며 꿀장수도 가끔 와 살고, 우리들도 가끔 ‘즘슴’을 먹고, 지붕 처마엔 참새도 살고, 매미 굼벵이도 몇 년씩을 기대어 살았다.

 

 

언젠가 우리 뒷집 조카가 즈의 아버지한테 다리 몽뎅이 부러질 큰 죄를 지었다. 그때 야밤에 어디 도망 가 숨을 곳이 없어 돈만이 집에 울며 갔더란다.

“보다시피 우리 집에 잘 데가 없구나.”

그 날은 돈만이 아버지가 와 계셨다.

방안에 앉아 담뱃대에 담배를 뻑뻑 피시던 돈만이 아버지는 우리 뒷집 내 조카의 눈물을 보시고는 일어나셨다.

“듣고보니 사정이 딱하구나. 네가 우리 집에서 자거라.”

그러고는 그 눈바람치는 북풍을 맞으며 집을 나서셨다.

얼음이 버쩍 언 경포호수 너머 머슴 사시는 그 허부잣집 행랑간에 잠을 자러 가시더란다.

나는 지금도 그 옛날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가슴이 복받친다.

 

 

 

암만 추워도

사람 사는 집 지붕 위의

눈은 녹지

 

두 식구가 살든

세 식구가 살든

알콩달콩

사는 그 온기 때문에

 

 

 

 

내 동시집 <잘 커다오, 꽝꽝나무야>(문학동네) 속의 ‘암만 추워도’라는 동시다. 이 동시도 내 친구 돈만이집의 그 날을 생각하며 썼다.

비록 아랫마을에서 제일 쪼꼬만 오막살이에 산대도 돈만이 아버지 마음은 누구보다 크셨다. 제일 좁은 마당이어도 그 마당은 동네에서 제일 컸고, 제일 작은 방이어도 그 방은 나그네를 잠재울 만큼 컸고, 제일 양식이 적어도 그 양식으로 노는 동네아이들을 먹였다.

 

 

 

 

그 후, 돈만이 아버지는 경포대역을 향해 달리던 기차에 치여 가엾게 돌아가셨다. 그의 어머니 역시 그후 병을 얻어 이승을 떠나셨다. 내가 듣기에 돈만이는 삼척의 탄광 어느 주변에 가 산다고 했고, 우리와 어울려 치마를 휩싸쥐고 축구를 하던 돈미는 시집을 가 아이를 낳다가 그만 죽었다고 했다.

무정도 하시지. 불운은 그렇게 돈만이 집을 들이닥쳤다.

교과서에서 배운 유명한 신들은 정말 계시기나 한 건지, 아니면 즈이 교도들만 보살펴 주시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