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집 시인 동시집 해설>
생명의 영원한 푸름을 노래하다
권영상 (시인, 전 한국동시문학회 회장)
어느 날, 한 낯선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건 마치 아득한 별에서 걸려온 전화와 비슷했습니다. 강원도 삼척에 김진광 시인과 가까이 사시면서 그에게 동시 사사를 받던 중, 갑작스런 그의 작고가 있었고, 그가 이 세상을 떠나가면서 권영상이라는 이름을 들먹이더라는 거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득한 전율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분은 그러시면서 두 번째 동시집을 내려 하는데 동시집 해설을 해주십사하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나는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승낙을 해드리고 전화를 끊었지요. 생각해 보려니 방금 마친 전화는 이 땅의 문법에는 없는 먼별에서 걸려온 통신 같았습니다. 작고하신 김진광 시인 추모사를 쓴 지 한 달도 안 되어 생긴 이 일에는 알 수 없는 인연이 서로에게 아련히 닿아있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이분께서 통화 말미에 자신을 우바새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우바새는 부처님의 뜻을 받들고 그 뜻을 대중들에게 펴는 일을 하는, 스님은 아니되 스님 하시는 일을 다 하는 이른바 재가불자를 이르는 말인데 편한 우리말로 법사를 뜻합니다.
바로 이분이 최광집 시인입니다.
나중에 동시집 원고와 함께 시집 ‘선정에 든 소나무’를 보내주셨는데, 거기 보니 시집 두 권을 내셨고, 동시집도 내셨고, KBS 창작 노랫말 공모에 동시 ‘기차놀이’가 당선되기도 하셨습니다.
이게 최광집 시인에 대해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나는 우바새라는 이 실오라기 같은 정보 하나에 의지해 동시집 원고 <오색딱따구리 나무병원>에 배어있을지도 모를 최시인의 시 정신을 읽어내려고 애썼습니다.
최광집 시인이 부처님 법에 기대어 사실 테니 번잡한 삶의 냄새가 덜 나리라 했는데 그건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그 어떤 시인들의 시보다 더 생생하고 더 건강한 삶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대상을 구부리거나 완곡하게 드러내기보다 사물의 본성을 솔직하게 탁 보여준다는 점이 마음에 그만 쏙 들었습니다.
1.
청록색 땡땡이 날개옷
배 밑 오렌지 색 깃털에
길고 날카로운 부리를 가진 물총새
버드나무 가지에 앉아
물속 피라미를 향해
다이빙 선수처럼
총알같이 곤두박질
물고기를 물고 나와
이리저리 동댕이쳐 기절시킨 다음
샛강 흙벽 구멍 둥지로 날아가
두리번두리번
새끼에게 먹이를 주고
하얀 똥을 물고
둥지 떠나 하늘 난다.
-‘새끼 키우는 물총새’ 전문
동시집 <오색딱따구리 나무병원>의 앞부분에 배치된 시입니다.
물총새가 사는 법을 그리고 있네요. 물총새는 날카로운 부리로 물속 피라미를 잡아 새끼를 먹여 살립니다. 먹여 살린다는 건 언제나 고단한 일이지요. 물고기를 물고 나와 ‘이리저리 동댕이쳐 기절시’키는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얀 똥’을 둥지 바깥으로 물어내는 일도 해야 합니다. 물총새가 이 세상에 나와 새끼를 낳아 키우며 살아가는 일이란 이렇듯 험난합니다. 이 시가 가혹하게 읽히면서도 고개를 돌릴 수 없게 하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이며, 생명 있는 것들의 치열한 세상살이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지요.
물총새는 겉보기에 화려한 날개옷을 입었지만 살기 위해서는 날카로운 부리로 타자인 피라미의 생명을 빼앗아야 하는, 그러면서도 위태위태한 ‘샛강 흙벽’에 의지해 사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바새가 바라보는 세상의 일면이며 우바새로 존재해야하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생명의 본성을 정직할 만큼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생태계의 건강함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읽히는 시입니다.
2.
말똥구리 같아
건드렸는데
지독한 방귀 냄새
코를 찌른다
흐르는 물에 손 씻어도
옷에 묻었는지
새 옷 갈아입고
스마트폰으로 찾아보니
노린재였다.
참 좋은
경험이다.
-‘참 좋은 경험’ 전문
말똥구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노린재였다는 쉬운 시입니다. 그러나 시를 덮고 생각해 보니 쉬운 시만은 아니네요. 혹시 우리는 지독한 방귀나 뀌는 노린재이면서 제법 그럴 듯한 외모의 말똥구리로 사는 건 아닐까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생각납니다. 본디의 이름 대신 센으로 살아가는한 인간세상으로 돌아가지 못 하는 치히로처럼 우리 또한 말똥구리라는 허상으로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말똥구리라 불리게 되면 그 이름을 떼어내거나 고치거나 바꾸기 어렵지요. 이 시에 나오는 ‘흐르는 물에 손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한 사물을, 또는 한 현상을 처음부터 올바르게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한 거지요. 최광집 시인은 그것을 ‘참 좋은 경험’이라고 말하고 있네요.
3.
몸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다
눈, 코, 귀, 입
마음의 심부름꾼
어떤 모습일까?
△, □, ○ . . . . . .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고 또 바뀌면서
깊숙한 곳에서
나를 데리고 논다
-‘마음은 어떤 모습일까?’ 전문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슬픔 기쁨 즐거움 아픔 등은 모두 어디에서 오는가, 이런 질문은 부처님 세상에서 오랫동안 고민해온 문제들입니다. 그것은 모두 알고 보니 마음에서 오더라는 것이지요. 이 마음 때문에 어제 기쁘던 것이 오늘은 슬퍼지고, 어제 슬프던 것이 오늘은 즐거워진다는 거지요.
우리가 이런 마음의 장난질에서 벗어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나를 데리고 노는 마음을 발견하고, 잘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래야 마음의 심부름꾼이 되더라도 정신이 올바른 심부름꾼이 된다는 거지요. 마음의 발견, 이것이야말로 흔들리는 나를 꼭 붙드는 일입니다.
이 시는 수시로 변하는 마음을 지켜보며, 그것에 휘둘리지 말자는 말머리를 우리에게 넌지시 던지고 있습니다.
4.
우리 가족에
이름을 올린 지 100일
엄마 젖 먹고
나비 모빌과 놀다가
쌔근쌔근 곤한 잠
지금 꿈속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강 건너
유채꽃밭을 찾아온
노랑나비들과
이꽃 저꽃 훨훨 날며
꽃구경하나?
- ‘꿀잠 자는 내 동생’ 전문
위의 시엔 아기가 ‘나비 모빌과 노는’ 현실과 ‘노랑나비들과 노는’ 꿈속이라는 두 개의 세상이 있네요. 이제 100일이 된 아기는 그 두 세상을 아무런 경계 없이 넘나듭니다. 근데 말이지요. 아무리 꿈이라도 100일밖에 안 된 아기가 강 건너 유채밭을 어떻게 알고 거기에 가 노랑나비들과 어떻게 놀 수 있을까요? 생각이 거기에 이르고 보면 ‘강 건너’ 그곳은 아기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살다온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 속 화자인 형과 최광집 시인은 아기가 두고 왔을지도 모를 바로 그 세상이 궁금한 거지요.
사람이란 문득문득 나는 어느 별을 떠나 이곳에 왔으며 또 어디로 갈 건지 그런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합니다. 이 시 역시 알 수 없는 생명의 먼 행로를 가만히 생각하게 하네요.
5.
서릿발 딛고
파릇파릇
초여름 햇살에
진청색으로 물드는 보리잎
바람이 보리 머리 빗질하니
하늘은 뭉게구름
저녁노을도 그리고
종달새는
이랑을 뜀틀삼아
수직으로 날아올라
오월의 푸른 무대에
청보리가 익는다.
-‘청보리밭 풍경’ 전문
이 시 ‘청보리밭 풍경’을 읽노라니 가슴이 쿵쿵쿵 뛰네요. ‘오월의 푸른 무대’처럼 약동하는 심장소리를 듣는 듯 합니다. 이 시를 지배하는 심상은 청색입니다. 청보리밭 풍경은 시인이 꿈꾸는 죽음이 없는 젊고 건강한 세상인 듯 합니다.
시인의 눈길의 방향은 서릿발을 딛고 자란 어린 청보리 → 진청색으로 물결치는 보리 → 뭉게구름, 저녁 노을 → 종달새의 비상 → 청보리가 익는 푸른 무대로 이동하고 있네요. 동적이며 싱그러운 그 풍경 안에는 보리라는 한 생명체의 일생이 담겨있습니다. 생명이 생명다워지는 데는 ‘서릿발’과 ‘초여름 햇살’이라는 시련이 필요하고, 뭉게구름이거나 저녁노을, 또는 종달새가 날아오르는 충만한 환경도 필요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청보리는 익어 결실을 이루는 거지요.
보리의 일생은 그렇게 익어 끝나지만 도무지 끝난 것 같지 않습니다. 그것은 청보리는 익어도 청보리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영원한 푸름을 노래하는, 이곳은 시인이 꿈꾸는 ‘오월의 푸른 무대’입니다.
6.
바람 타고
하늘 높이 올라
뿌리 내리고 살 곳 찾는 민들레
시냇물 소리 졸 졸 졸
새하얀 파꽃이
보랏빛 감자꽃 반긴다
햇살 잘 드는
길갓집 담장 밑에
졸고 있는 얼룩 고양이가 좋아
사뿐히 내려앉아
내년 봄
초록 치마 지어 입고
노랑물이 흐르도록 웃어볼래요.
-‘민들레 꽃씨 여행’ 전문
다음 생을 기약하는 민들레의 행로를 그린 노래네요. 이쪽 어느 땅에서 노란 꽃을 피워 한 생을 산 민들레는 해가 바뀌면 또 어느 땅으로 떠나야 하지요. 그것은 눈물겨운 작별이 아니라 생명의 순리이며 순환인 거지요. 갯강 흙벽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낳아 기른 물총새도, 말똥구리인 척 살아낸 노린재도 한 생이 끝나면 모두 돌아올 봄을 기약하며 어딘가로 자리를 옮겨 앉아야 합니다. 가급적이면 거기가 ‘햇살 잘 드는 담장 밑’이거나 화자가 좋아하는 ‘얼룩 고양이 곁’이었으면 좋겠네요. 거기서 ‘노랑물이 흐르도록 웃는’ 시인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민들레 꽃씨의 여행은 내년 봄이 오면 끝날 테지요. 그러나 끝이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봄이 있는 한 영원할 테지요.
최광집 시인의 시의 여행이,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펴시는 우바새의 여정이 아름답기를 빌며 꽃씨의 여행처럼 영원히 향기롭기를 바랍니다. 청보리빛 <오색딱따구리 나무병원>의 출간을 축하합니다.
최광집 동시집 <오색딱따구리 나무병원> 2022년 8월. 해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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