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눈 덮인 설산

권영상 2019. 12. 6. 11:09




눈 덮인 설산

권영상



겨울이 깊어간다. 기상예보는 먼 산에 눈 내린다는 소식을 가끔 전한다. 그와 함께 SNS에도 눈 소식과 함께 눈 덮인 산록의 풍경이 올라온다. 엊그제는 택시운전을 하는 고향친구가 경포호숫가에서 찍은 눈 덮인 대관령 모습을 보내왔다. 고향이 속초인 친구는 내설악의 눈 풍경을, 제주에 사는 글쟁이 친구는 한라산 어리목 눈 풍경을 보내왔다.



멋있다기 보다 볼수록 신비에 가깝다. 신비하다는 말은 가까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먼 산, 그것도 눈 덮인 설산은 봄이나 여름산과 달리 높고 지엄하다. 다가간다고 해도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거리와 높이를 지닌다. 실제로 겨울산은 가파른 비탈과 수직의 빙벽과 눈으로 섣불리 다가서는 자를 응징한다. 실수와 만용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설산은 우리와 점점 멀어진다. 우리가 가을 단풍의 유혹에 견디지 못해 버스로 버스로 산을 찾던 그 때와 달리 겨울산은 사람의 번다한 발소리를 싫어한다. 산은 인적을 피해 지엄한 영역으로 들어간다.

대개의 큰 산은 삼동을 통해 다시 산 본래의 산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풍화에 느긋해진 산비탈을 가파르게 내리치고, 둥글어진 바위를 날카롭게 깎아내고, 산기슭에 힘없이 선 나무는 눈보라를 몰아와 잔인하게 꺾어버린다. 그뿐인가. 두루뭉실 이어지는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는 냉정하리만치 끊어버리고, 펀펀해지는 능선은 칼날처럼 위태하게 만들거나 마디마디 잘라내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산다운 산으로 돌아간다.



산은 본디 사람이 아닌 신의 영역이다. 그곳은 발 없이도 다닐 수 있는, 걸음을 걷지 않고도 산봉우리와 산봉우리를 건널 수 있는, 냉혹한 추위를 추위로 느낄 줄 모르는, 밥이 없어도 죽지 않는 신들이 사는 준엄하고 지엄한 세계다. 그러기에 설산에는 산을 지키는 호랑이를 제외하고 다들 산 아래로 아래로 내려온다.

그런데 나는 올라간 적이 있다.



이제 막 17살을 넘기던 겨울이다. 무슨 생각이 있었던지 나는 혼자 눈 덮인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 앞에 섰다. 아무 등산 장비도, 아무 숙식비도 없이, 문득 일어난 결심으로 대관령을 걸어 넘어서고 싶었다. 그때 나는 값싼 운동화와 평소에 입는 겨울옷과 손을 넣을 수 있는 점퍼주머니. 단 그것에 의지해 걸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먹는 일과 잠자는 일쯤 가벼이 보았다. 오직 내 두 다리의 도발적인 의지를 신뢰할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위험한 도전이었고, 죽음에 입맞추려는 객기였다. 하지만 나는 무려 8시간의 사투 끝에 830여미터 대관령을 걸어 넘었고, 무사히 귀환했다. 그러나 그 이후 나는 겨울의 설산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건 그 무렵, 설산이 냉혹하리만치 제 몸을 도려내고, 깎고, 후비고, 쳐내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의 산은 자기 자신에게는 물론 타인에게도 매울만치 냉혹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위태위태 쓰러지는 생명을 보고도 모른 체 외면하거나 빙판길을 오가는 자동차마저 나를 위해 세워주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산은 마치 신처럼 가혹했다.



겨울이 깊을수록 산은 내게서 멀어진다. 그러나 실은 내 안으로 들어와 ‘저 산’이 아닌 ‘나의 산’으로 자리잡는다. 이즈음이면 산이 그러하듯 나의 산에도 쉬임없이 눈을 퍼붓거나 찬바람을 몰아치게 해 나를 냉철하게 할 일이 남는다. 지금은 내 안에 서늘한 설산을 키울 차례다. 봄과 여름과 가을의 산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런 설산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먼 어느 산에 지금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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