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다 남긴 물 반 컵
권 영 상
출근을 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정수기가 있는 교무실에 물을 뜨러 가는 일이다. 오늘 하루 마실 물 한 병, 이 물을 떠오면 나의 학교 일이 정상적으로 시작된다. 내가 머무는 도서실과 교무실은 건물이 다르다. 거기로 가려면 세 그루의 향나무 곁을 지나야 한다.
향나무 곁을 지나 교무실에 가면 어제 마시고 남은 머그컵의 물을 개수대에 버리고 물병과 함께 씻어 정수기물을 받아온다. 근데 언제부터인지 개수대에 버리던 물을 첫 번째 향나무 발밑에 주기 시작했다. 남은 물이라 해 봐야 차를 마시다 남긴 한 모금 정도, 아니면 일이 너무 바빠 차마저 마시지 못해 남긴 한 컵 정도의 물, 그게 전부다. 그 물을 주기 시작했다.
“입이라도 적시렴.”
나는 잠시 향나무 아래 서서 물을 부어주며 그렇게 말한다. 속으로, 또는 직접 말로.
“선생님, 나무 보고 뭐라 하셨어요?”
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 지나가던 아이가 묻는다.
“아침 인사를 했다.”
“나무 보고요?”
“그래. 잘 잤느냐고.”
“나무 보고 인사를 다 해요?”
“선생님 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그러면 아이는 “아!”하고 물러난다.
이 학교가 세워진지 60년이 넘었으니 나무는 나보다 나이가 많다.
그렇게 아침 인사 삼아 마시다 남긴 물을 첫 번째 나무에게 주었다. 주면서 이 물이 나무의 인생에 뭔 도움이 되어도 되겠지 한다. 그렇게 매일 물 반 컵을 주어온 지가 3년은 더 넘었다. 그것도 물을 준 거라고,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고 그 첫 번째 향나무를 보러 운동장으로 걸어나간다. 나가면서 향나무 세 그루 중에 내가 물을 준 첫 번째 향나무가 더 키가 크고, 더 푸르고, 더 실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막상 멀리 떨어져서 보면 아무 차이가 없다. 그걸 알고는 실소를 하며 되돌아오곤 한다.
요즘 가뭄이 심하다.
가뭄에 타들어가는 길가의 화초나 쥐똥나무를 보면 안타깝다. 남은 물 한 컵이라도 들고 나가 목을 축여주고 싶다. 뉴스에선 내주에 올 거라던 장마가 내달에나 올 거라 한다. 전국이 가뭄에 시달리는 모양이다.
토요일, 동네 산에 가려고 집을 나서다 보니 근처 느티나무 숲에도 가뭄이 심하다. 가장 심한 곳이 비탈진 곳이다. 수분을 빨리 빼앗기기 때문이다. 명아주며 개망초, 또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이 푹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떤 비탈엔 잎이 말라 오그라들었거나 아예 누렇게 말라죽어 있다. 풀이나 나무가 힘을 잃을 때 제일 먼저 덤벼드는 건 병충이다. 비탈에 선 어린 아카시나무 모가지가 달라붙은 진딧물에 새하얗다. 애처롭다.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팍팍해질 때에 제일 먼저 힘들어하는 이들이 비탈에 선 사람들이다. 길을 가다가 가뭄에 타는 풀들을 잠깐 멈추어 서서 바라본다. 그렇게 좀 바라보아 주는 것이 어쩌면 그들에게 뭔 힘이라도 될 것 같아서다. ‘한 열흘만 잘 견뎌 보려무나.’ 잔인한 말 같지만 그렇게 말해 주고 걸음을 뗀다.
장마비든 그냥 비든, 잠시 오는 소낙비든 얼른 좀 왔으면 싶다. 가뭄에 시달리는 초목 곁을 지나 내 한 몸 좋자고 산을 오르는 게 부끄럽다. 지난 4월, 그렇게 황홀히 피던 찔레꽃 덩굴이 가뭄에 타고 있다. 거죽만 푸른 빛이지 덩굴 밑을 들추니 말라버린 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한 때 곱게 핀 이 앞에서 ‘찔레꽃’ 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래 마주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 갈증을 호소하고 있다. 아무 노릇을 못하는 내가 미안하다.
걸음을 내딛는 발밑에 마른 흙먼지가 인다.
한참 산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아침해가 옅은 구름 뒤에 새빨갛게 떠 있다. 오늘도 비 한 방울 없이 더울 모양이다. 저녁에도 잘 내다보지 않던 일몰을 창밖으로 내다보곤 한다. 해가 붉고 노을이 요란하면 이튿날이 뜨겁다고 한다. 계속 되는 가뭄이 사람탓이 아니길 빌며 산을 오른다.
내가 마시다 남긴 물 반 컵. 그걸 개수대에 버리지 않고 향나무 발등에 부어준 일이 다행스럽기만 하다. 이 세상, 그 많은 나무들 중 어느 한 목숨을 위해 내 손이 쓰였다는 걸 생각하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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