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피아노 선생님
권영상
딸아이가 7살. 초등학교에 보낸 우리들은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전에 없이 이 어린 딸아이의 미래를 자꾸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어보는, 서툴기만했던 그때 우리의 심정은 그랬습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아내가 피아노 한 대를 거실에 들여놓았습니다. 변두리의 조그마한 연립에 세들어사는 우리에게 피아노는 낯설고, 엄숙한 물건이었습니다.
“공부학원 대신이다.”
아내는 그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았지요. 식구가 많은 집안의 딸로 태어난 아내는 어린 시절 피아노를 치고 싶었지만 그꿈을 이루지 못했지요. 나중에 알았지만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피아노에 대한 꿈이 있었다는 걸 알았고, 엄마가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식을 통해 이루고 싶어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피아노가 집에 들어오자, 아내는 퇴근 뒤 딸아이에 맞는 피아노 선생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수소문 끝에 간신히 한분을 모셔왔습니다. 모 신학대학을 다니는 젊은 여대생이었습니다. 그분은 일주일에 두 번씩 피아노 공부를 시켜주시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한 달여가 지나도 그분은 피아노 뚜껑을 열지 않았습니다. 가끔 퇴근하여 돌아와 보면 피아노공부가 아니라 마당가에서 딸아이와 놀고 있었습니다. 분에 넘치는 피아노를 사 놓았는데, 그걸 열지 않는다는 게 궁금했습니다.
“아빠, 같은 대나무 통도 두드리는 위치에 따라 소리가 달라.”
7살인 딸아이는 음식점에서 얻어온 죽통을 두드려 보였습니다.
“그건 돌멩이도 마찬가지야.”
마당에서 선생님과 노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같은 물체라도 위치마다 음감이 다르다는 걸 배워갔던 겁니다. 마당가 나무 벤치의 등받이를 두드리면서 ‘이건 레에 가까운 미 소리고, 이 소리는 솔에 가까워.’ 그러며 마당 여기저기에 있는 깨어진 그릇조각이며, 유리병이며 아래층 아저씨가 쓰는 역기 쇠파이프를 두드려 보였습니다.
그렇게 한 달여가 지나서야 선생님은 바이엘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체르니를 반쯤 떼어가던 어느 날입니다, 선생님은 독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선생님을 모시고 조그마한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작별했습니다. 아내가 다음 선생님을 찾기 시작하던 어느 날 딸아이가 물었습니다.
“아빠, 여자도 유학 가?”
“그럼. 원한다면 누구나.”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딸아이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습니다.
“나도 갈 거야.”
어느 날입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바이올린을 사달라고 했습니다. 친구가 켜는 바이올린을 조금 켜봤는데 혼자 익힐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꺾을 수 없어 개인레슨을 받게 해줄 수 없다는 다짐을 받고 사주었습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어느 겨울, 한 장의 초대장이 우리에게 날아왔습니다.
3년 전 피아노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의 귀국연주 초대장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10살이 된 딸아이와 함께 연주회장을 찾아갔습니다. 멋진 드레스를 입은 선생님은 그날 너무도 멋진 피아노 연주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고, 귀국을 환영했습니다.
“선생님이 너무 달라지셨어.”
돌아오는 길에 딸아이가 그랬습니다. 우리는 반가움과 흥분에 빠져 있었는데 딸아이는 그 옛날의 선생님 모습과 지금의 훌륭해진 모습을 비교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후, 딸아이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 남부의 한 대학에 유학하게 되었고, 그 대학 오케스트라에 바이올린 주자로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딸아이는 지금 바이올린 전문 연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때 딸아이에게 그걸 요구하지 않았으니까요. 힘들 때면 가끔 그 일을 이겨내기 위해 악기를 다루라고 일렀을 뿐이었지요. 그런 까닭에 피아노 선생님에게 성급한 요구는 절대로 삼갔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좀 켜 보지 그래.”
가끔 그런 엉뚱한 요구를 할라치면 딸아이는 싫다않고 제법 그럴 듯하게 켜주지요.
그때마다 연립주택 마당에서 딸아이에게 절대음감을 키워주시던 그분의 피아노 지도법을 떠올리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