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깊은 도깨비
권영상
옛날 옛적, 간 날 간 적, 그 무렵 이야기다.
도깨비가 돈 50냥을 빌리러 구두쇠영감을 찾아갔다. 도깨비라는 걸 한눈에 알아본 구두쇠영감은 군말 없이 그 돈을 빌려줬다. 그 후, 도깨비는 저녁마다 꾸어간 돈 50냥을 구두쇠영감네 마루 위에 올려놓고 갔다. 하루도 아니고 매일 밤을 그렇게 50냥씩 가져다 놓았다.
하루는 사람들이 구두쇠영감 집에 찾아와 부자 된 내력을 물었다.
“아, 그 우매한 도깨비 놈이 매일 돈을 가져다주니 부자가 안 될 수 없지!”
자랑삼아 그 이야기를 했다.
그날도 돈을 갚으러 오던 도깨비가 그 이야기를 엿들었다. 화가 난 도깨비는 복수를 별렀다. 그것도 모르고 도깨비 골려먹는 일에 재미를 붙인 구두쇠영감이 길 건너 돌밭에 나가 도깨비 들으라고 넌지시 말했다.
“내 밭 망쳐 놓기야 쉽지. 이 귀한 돌멩이는 버리고 더러운 쇠똥을 가득 쌓아놓으면 금방 밭이 썪어버릴 테지. 머리 나쁜 도깨비가 그걸 알꼬.”
다음 날 아침, 길 건너 돌밭에 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돌멩이는 다 없어지고 개똥 소똥이 가득 쌓여 있더란다. 그 덕에 그해 구두쇠영감네 가을걷이가 풍족했으리란 건 뻔 한 일.
새삼스럽게 도깨비 이야기를 했다.
하도 웃기는 녀석이 도깨비고, 하도 바보 같은 녀석이 도깨비라 도깨비 이야기는 읽어볼수록 재밌다. 어렸을 적엔 도깨비 행적이 신기해 재미나게 읽었고, 나이 먹어서는 우리네 못난 욕심과, 허황된 꿈을 만날 수 있어 재미나게 읽는다. 우리는 어떤 사람일꼬? 그런 질문에 쉽게 답을 주는 물건치고 도깨비만한 게 없다.
위의 옛날이야기 속 도깨비는 바보다. 빌린 돈 50냥을 갚고도 그걸 잊어먹고 또 갚는다. 그뿐인가 밭에다 ‘더러운 소똥이나 쌓아놓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복수한답시고 소똥 개똥을 쌓아놓는다. 어리석고 바보같다.
근데 이 나이쯤에 와 생각해 보니 이 도깨비가 바보만은 아닌 듯 하다. 바보라기보다 한없는 베풂의 화신이다. 준 것은 잊어버린다. 그리고 줄 것만 생각한다. 복수를 해도 사람을 해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복수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색한 구두쇠영감마저 베풂으로써 풍족한 수확의 기쁨을 맛보게 해준다. 보통 사람의 머리로는 가늠할 수 없는 베풂의 너그러움을 발휘한다.
도깨비는 생각이 모자라며 경솔하다. 뭘 해도 허황기가 가득하여 졸속투성이다. 재주는 있으되 그가 부리는 재주는 금방 탄로 나는 잔재주다. 순발력이 뛰어나나 지속적이지 못한 성미 또한 우리를 닮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 도깨비를 이 글 한 편으로 뒤집자는 게 아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속 깊은 구석도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이를테면 키가 구 척인 도깨비가 동네 사내들과 씨름하면 판판이 진다. 정말 힘이 부쳐서 지는 걸까. 지는 게 아니고 져줌으로써 이기는 기쁨을 맛보게 하려는 속 깊은 배려심은 아닐까. 내가 보기엔 자신을 어리석고 바보스럽게 만들어 상대에게 한 순간이나마 우월감을 맛보게 해주는 존재가 도깨비인 듯 하다.
도깨비는 요즘처럼 제 뜻을 펼 수 없는 갑갑하고 허기진 시대와 공간 속에서 종종 나타났다. 그렇게 나타나 우리의 구차한 일상을 한순간 짊어져주고 달아난다. 비록 구두쇠영감일지라도 아프게 복수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그게 다름 아닌 우리의 마음이고 우리 조상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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