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 구덩이 2

박주가리의 빛나는 여행

박주가리의 빛나는 여행 권영상 바람이 분다. 처마 끝에 매달아 둔 풍경이 쟁그랑거린다. 봄바람이다. 바람은 들판의 추위가 설핏 풀리면서 시작됐다. 멀리 거제도로 여행을 간 친구는 그쪽의 봄을 찍어 보냈다. 이쪽에선 꼼짝 않는 매화꽃이 그쪽에선 한창이다. 사람은 매화꽃 사진으로 봄을 알지만 대지는 이미 봄을 느끼고 있다. 생명 활동이 조용히 시작되고 있다는 뜻이다. 하던 일을 놓고 창밖을 내다본다. 바람이 여기저기로 몰려다닌다. 그 바람 속에 반짝이며 둥둥 떠다니는 것들이 보인다. 은실 깃털들이다. 창을 열고 내다보니 집 남쪽 모퉁이에서 바람을 타고 몰려나온다. 점심 끝에 무 한 덩이를 꺼내려고 텃밭 무 구덩이에 나가며 보니 마루 틈 사이에, 으아리 마른 덩굴에 그 반짝이던 은빛 깃털들이 걸려있다. 놀랍게..

가을이 남기고간 것들

가을이 남기고간 것들 권영상 아내가 동치미를 담그러 안성에 내려왔다. 간밤 소금에 굴려둔 무는 아내에게 맡기고, 나는 밭 정리를 하러 텃밭에 나왔다. 지난 번 강추위 예보에 서둘러 뽑은 무 밭 뒷모습이 꼭 우리의 뒷모습 같아 그간 부끄러웠다. 이랑마다 무 뽑은 그 판한 구멍들이며 여기저기 급한 대로 잘라놓은 무순들, 무 구덩이에 무를 묻느라 파헤친 흙들, 그리고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들...... 이 자리에 무씨를 넣은 건 지난 8월 15일이다. 40년 그 이전부터 고향의 아버지는 어김없이 이 날 무밭에 무씨를 넣으셨다. 그것을 내가 물려받았다. ‘이랑은 굵게 무 상간은 넓게.’ 글 모르는 아버지의 무 키우시는 신념이다. 그러나 그건 아버지가 경작하시는 기름진 밭에는 맞는 말이지만 거름기 적은 이 안성 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