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시시해니즘에 빠지다

권영상 2016. 7. 25. 16:12

시시해니즘에 빠지다

권영상




아침에 아내가 베란다로 나를 불러 장미허브 위로 지나간 달팽이 발자국을 보여준다. 명주실처럼 가늘게 반짝인다. 그걸 보고도 암말 없는 나를 보자, 아내는 놀랍지 않냐는 눈치다.

“놀랍긴? 시시한 걸 가지고.”

나는 퉁명스럽게 말하고 돌아섰다. 방에 들어가 사놓고 한 번도 읽지 않은 시집을 꺼내 몇 장을 읽었다. 날이 덥다. 반쯤 열린 창문을 활짝 열었다. 또 몇 장 읽다가 냉장고 물을 꺼내 마셨다. 또 몇 장을 읽다가 발톱을 깎았다.



“참, 시들 시시하네.”

나는 읽던 시집을 들고 나와 식탁 위에 던졌다.

아내가 집어 들더니, 저쪽 주방 바닥에 엎드려 읽는다. 나는 일없이 텔레비전을 켰다. 연속극이다. 채널을 돌렸다. 영국제 주방접시 광고다. 또 돌렸다. 이종 격투기다. 어디선가 가끔 보던 이가 나왔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이미지와 달리 해도 너무 못한다. 명색이 이종격투기인데 할 줄 아는 게 펀치를 뻗어보이는 것 외에 없다. 텔레비전을 껐다. 그야말로 시시하다.



“시시하긴. 이 시들 굉장히 좋은 데.......”

일어서는 내게 아내가 다시 읽어보라며 내민다. 아내가 이거, 이거, 이거 하며 책귀를 접어놓은 시를 읽었다. 뭐 그렇고 그렇다. 신선함이라곤 없다. 책상 위에 시집을 놓고 손으로 탁 치는 소리를 아내가 들은 모양이다.

“요새 당신 ‘시시해니즘’에 빠진 것 같은데.........” 그런다.

그게 뭔 말이냐는 말에 만사가 재미없는 병, 한다. 맞다. 그러고 보니 만사가 시시해 보인지 며칠 됐다. 그 맛있던 밥이 맛이 없다. 글 같잖은 글을 써놓고도 명작이나 되는 듯 흥분했는데 그게 없어졌다. 아내가 사준 남방 하나로도 사는 일이 신나고 내일이 기다려졌는데 그게 없어졌다. 길바닥에 떨어진 단추 하나도, 보도블럭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풀 한 포기조차 의미있고 경이로워 보였는데, 요 며칠 전부터 그게 모두 다 싱겁게 보였다.



살면서 가끔 이런 때가 올까봐 별거 아닌 일에도 나는 억지로 나를 충동질했다. 오오! 굉장하네! 어디 다시 보자! 기막힌 걸! 이런 건 처음이야! 네 모습에 놀랐어! 신선해! 그런 말로 나는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는 인생이란 게 뭐 날마다 새로울 게 없다. 그날이 그날이고, 그 일이 그 일이다. 시시하다고 보면 시시하지 않은 게 없다. 그런데도 잘 견녀내며 살아올 수 있었던 건 늘 새롭게 보아내려는 눈물겨운 나의 투쟁 덕분이다. 그러니까 나는 날마다 나를 그렇게 속여왔던 거다. 별거 아닌 세상일을 별 것인 양. 결말이 뻔해 보이는 일을 그래도 혹시, 하는 기대감으로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더는 나를 속이지 못할 때에 지금 내가 들어선 듯하다. 아내가 말하는 ‘시시해니즘’에 내가 빠졌다. 시시한 세상을 그래도 의미있는 세상으로 다독일 힘이 없어졌다. 보통은 한 사나흘 이러다 마는 데 아니다. 별거 아닌 세상일이 자꾸 별거 아닌 일로 보인다.



아무래도 세상이 나를 너무 속이는 것 같다.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이들일수록 더 그런다. 무얼 먹어도 너무 많이 먹고, 무얼 가져도 턱없이 많이 가지고 산다. 그들이 골목길에 살고 있는 우리 마음을 알기나 할까. 살맛이 자꾸 떨어진다. 세상이 자꾸 시시해진다.

오늘 밤엔 술이라도 한 잔 해야겠다. 그러나 술을 마시자니 걱정이 앞선다. 오늘은 또 무슨 말로 나를 속이며 술을 받아들여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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