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여름이 오는 징후

권영상 2016. 7. 18. 11:07


여름이 오는 징후

권영상

    


 


아침을 먹는데 창밖에서 짜아아아, 매미가 운다.

, 여름이구나!.”

뭐 대단한 걸 발견이라도 한듯 나는 소리쳤다. 이미 한 차례 장마가 지나갔지만 아직 매미소리는 없었다. 우리는 그동안 무미한 여름의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여름이란 것이 고적한 것이었다.

매미는 더이상 울지 않았다. 그저 한번 짜아, 울어놓고는 기척이 없다. 밥을 먹고 창가에 나가 아파트 마당에 가득 우거진 고적한 숲을 내다본다. 느티나무며 모과나무, 감나무, 나무 벤치를 덮고 있는 등나무, 모두 짙은 초록덩어리다. 숨이 찰 만큼 여름이 가까이 왔다. 그런데도 아직 매미 우는 시절이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좀전에 한 소절 짧게 운 매미 소리는 무엇인가. 여름이 깊숙히 들어오고 있다는 징후가 분명하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다 그 예후라는 것이 있다. 갑자기 몸이 아파 쓰러지는 일이란 없다. 갑작스레 평지에서 고산준봉을 만나는 일도 없다. 계절도 그와 같아 갑작스럽게 들이닥치지 않는다. 다 예후가 있다. 이를테면 남쪽 어디에 유채꽃이 핀다는 소식을 몇 번이나 듣고난 후에야 이쪽 내륙의 들판에 민들레꽃이 하나 둘 피면서 봄이 온다. 여름도 그렇다. 모란이 피고, 울타리를 기던 덩굴장미꽃이 피면 머지않아 여름이 온다는 걸 예감할 수 있다.





얼마 전부터 건너편 아파트 위로 뭉게뭉게 피는 뭉게구름을 본다. 뭉게구름이 피면 여름이 도시로 깊숙이 들어오고 있다는 징조다. 여름은 이들 모란과 장미와 백합이며 뭉게구름을 앞세우고 온다. 갑작스레 장맛비와 무더위를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적응할만한 시간을 천천히 주면서 나타난다.

이즈음엔 시골집 뜰앞에서 분홍으로 핀 봉숭아꽃을 반갑게 만난다. 봉숭아꽃도 여름이 우리들 속에 깊숙이 들어서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대표적인 여름 징후 중의 하나다.




엊그제다. 남해안 고성에 일이 있어 갔었다. 글쓰는 이들 십여 명의 모임이 있었다. 깊은 산중에 있는 그 숲숙의 집 마당에도 봉숭아가 피고 있었다. 모인 사람중의 누군가가 아, 여름이다! 하면서 손톱에 봉숭아 꽃물 들일 것을 제안했다. 그때 모인 분들치고 어렸을 적 엄마 앞에 손을 내어 봉숭아 꽃물쯤 다 들였을 것이다. 나도 새끼 손가락에 봉숭아꽃물을 들였다. 예전 고향집 뒤란에도 봉숭아꽃이 있었다. 장맛비에 지루해할 즈음이면 누나는 나를 뒤란으로 불러내어 봉숭아 꽃물을 들여주었다. 그 일은 지루한 장마를 견디면서 다가올 가을을 기약하는 일이기도 했다.



봉숭아 꽃물을 손에 들이고 서울로 돌아온 다음 날이 오늘이다. 남쪽 해안 지방 고성의 여름을 데리고 내가 올라온 모양이다. 아침절에 매미가 울었으니까. 오늘은 한 차례, 짜아, 하고 울었지만 며칠 후면 귀가 먹먹하도록 울 테다. 그때가 되면 열대의 밤과 싸워야 하고, 지루한 장맛비를 견뎌야 한다.




언젠가 더위가 힘을 잃을 쯤이면 풀벌레들이 울 차례다. 밤하늘 달이 여느 때와 달리 또렷해 보이거나 속절없이 소나기가 내리면 머지않아 가을이다. 예전 사람은 하늘의 기운을 읽어내는 일을 중히 여겼다. 사람의 일이 모두 하늘의 기운에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일을 오직 기상예보에 맡기고 산다. 행여 예보가 틀리면 무심한 자신을 나무라는 게 아니다. 기상청에 온갖 불만을 쏟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