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정종 한 병

권영상 2013. 8. 5. 10:53

 

정종 한 병

권영상

 

 

 

 

 

20대 후반 무렵이다.

대학은 마쳤지만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산다는 일이 좀 막막했다. 내 스스로 아버지 보기에 사람 구실을 못한다는 게 사뭇 부끄러웠다. 집안 살림이 빈곤해 금방이라도 밥벌이를 해야 할 형편은 아니었지만 멀쩡한 체신으로 빈둥거린다는 게 한심스러웠다. 그 무렵의 섣달그믐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지금도 그렇지만 섣달그믐을 맞으면 마음이 우울했다. 직장 없이 빈둥거리는 사내의 마음이 당연히 그랬다. 나는 그 우울을 떨쳐버리기 위해 집안의 벽지를 다 뜯었다.

 

당시 우리 집은 여덟 칸 집이었다. 부엌과 뒤주방을 빼면 방이 다섯 개였다. 그 방의 벽지를 다 뜯은 건 어떤 새로운 기다림 때문이었다. 아무 약속된 미래도 없었지만 나는 막연히 그런 기대를 안고 벽지를 뜯고, 새 벽지를 붙였다. 그건 앞으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내 답답한 젊음에 대한 분노였고, 그런 고통의 시절을 뒤집어 엎어보려는 복받침이었다. 어머니는 10여 년을 병원 침상에 누워계셨고, 아버지는 12명이나 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눈 붙일 새가 없으셨다. 아버지 일을 돕는다고 하지만 나는 늘상 내 자신에 대한 분노에 차 있었고, 우환이 있는 집안 일이란 늘 불운하였다.

 

 

방마다 새 벽지를 바르고 난 뒤 흙먼지를 뒤집어 쓴 머리를 털러 바깥에 나올 때엔 이미 그믐날의 하루는 다 저물었다.

그럴 때였다.

뉘엿뉘엿하는 잔명 속에 마을길을 걸어 들어오는 이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고향을 떠나 대처에 나가 살던 이들이다. 그들은 가족과 함께, 또는 저 혼자의 몸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불과 여덟 집이 모여사는 마을이고 보면 그 어룽대는 실루엣의 실체가 누군지 모를 리 없다.
“대추나무집 진호 형님 아니십니까!”
나는 옷을 털고 다가가 그를 맞았다. 그게 고향이 아니겠는가. 나도 반갑고 그분도 반갑고. 그렇게 악수를 나누고 헤어질 때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에 내 눈이 갔다. 정종이었다. 그들이 가방을 들고 오든지 달랑 맨 몸으로 오든지 간에 그들의 손에는 대체로 정종 한 병이 들려 있었다.

큼직한 정종 한 됫병.

나는 물끄러미 그들이 들고 어둠속으로 사라져 가는 정종 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왠지 내 심장이 찡, 울었다.

 

아버지께서 분가해 나오셨으니 정종을 올릴 조상이 우리 집엔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먹먹한 몸부림에 떨었던 건 사람 노릇을 못하는데 대한 슬픔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들에게 있어 술은 향락 이외의 엄숙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 조상을 모시고 부모를 공경하는 방식 중의 하나가 술이다. 농경을 하는 가정에서 나는 보수적으로 성장했다. 지금도 보수적이다. 나는 그걸 당당히 생각하는데, 아마 그런 내 핏줄 속에 잠재해 있던 엄숙미를 그 정종 한 병에서 느꼈던 게 아닌가 한다. 사람 노릇을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더욱 그랬겠다.

 

방학 전에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새해 소망을 물어봤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공부를 좀 잘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족이 싸우지 말았으면 좋겠다고도 하고, 이모가 얼른 결혼했으면 좋겠다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또 많은 아이들은 아버지가, 또는 삼촌이 얼른 취직을 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나는 사내가 일을 갖지 못하는 고통과 아픔을 이해한다. 그들의 소망이 설 끝에는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뒷베란다에 정종 사다놨어!”
아내가 벌써 고향 내려갈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지난 30년 동안 설을 쇠러 가는 길에 한 번도 놓치지 않은 것이 정종 한 병이다.

(교차로신문 2011년 1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