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쓸데없는 일과 쓸데 있는 일

권영상 2013. 7. 24. 15:57

 

쓸데없는 일과 쓸데 있는 일

권영상

 

 

 

 

구청에서 숲 정리를 하느라 베어놓은 나무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적당한 걸 골라와 나무의자를 만든다. 집 뒷마당에 쟁기통을 꺼내놓고 베고, 자르고, 파고 한다. 그러다보면 손을 찧거나 베거나 옷을 찢어먹기 일쑤다. 쉬려면 잘 쉬든지, 왜 손 다쳐가며 쓸데없는 일을 하냐고 아내가 군소리를 한다.

아내 말이 맞다. 의자가 필요하면 좋은 의자를 사다 쓰면 시간도 얻고, 편리하다. 그런 방법을 두고 굳이 쓸데없는 일에 나는 몰두한다. 다 만든 의자를 방안에 들여다 놓고 떡 올라앉아본다. 삐그덕하며 의자는 단번에 주저앉는다. 결국은 그러고 말 일에다 나는 한나절을 쓴다.

 

 


한 달에 서너 번씩은 술을 마신다. 마셨다 하면 적잖게 마신다. 길거리 벤치에 누워 잘 만큼 많이 마신다. 그렇게 마시고 나면 사나흘이 괴롭다.

“쓸데없이 술은 마셔가지고!”

뱃구레를 잡고 괴로워하는 나를 아내는 또 나무란다. 정말 그렇다. 돈 들여 술 먹고, 술 먹어 속 버리고, 며칠 동안 힘을 놓고 살아간다. 쓸데없어도 정말 쓸데없는 일이 술 먹는 일이다.

내가 즐기는 양말 꿰매기도 쓸데없는 일 중의 하나다. 건조대에 널어놓은 빨래를 개는 일이 나의 일이다. 양말을 개다가 구멍난 양말을 보면 그냥 버리기 아까울 때가 있다. 어렸을 적 어머니한테 배운 대로 나는 가끔 그 양말을 꿰맨다.

예전에는 물자가 귀했으니 그랬다 해도 지금 세상까지 와서 양말을 꿰매 신는다는 건 절약도 미덕도 아니다. 그 양말을 신고 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돈 만 원이면 양말이 열 컬레예요.”
물정없이, 꿰맨 양말 신고 다닌다는 충고를 후배한테 들었다.

집에 돌아와 그 말을 하니 아내가 참지 못한다. 쓸데없는 일로 체신 깎이며 다닌다고. 쓸데없는 일이란 대체로 이런 천성을 갖는다. 주변 사람 눈에 비호의적으로 보인다. ‘그 나이 돼 가지고.’ 라거나 ‘그렇게 할 일 없으면 땅이나 파지.’, ‘힘 쓰느니 잠이나 자지.’ 뭐 그런 마뜩잖어하는 군소리를 듣게 한다. 생계와 전혀 관련 없는 성미도 있다.

사람들 중엔 틈만 나면 종이학을 접고, 코를 후비고, 음란한 사진을 보고, 절벽타기를 하고, 오줌풀 자생지를 찾아낸다며 전국을 쏘다니고, 원격 쌍발 비행기를 날린다며 한강고수부지에 몇 날 며칠을 나가 사는이도 있다.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 같다. 뭐니뭐니 해도 비경제적이다. 무모하고 맹목적이며 소모적인 일처럼 보이는 게 바로 쓸데없는 일의 생리다.

 

 

 


그러나 이 쓸데없는 일에는 ‘쓸데있는 일’에서 접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 일의 매임과 구속이 없다. 문학으로 치자면 수필과 같다. 주제가 자유롭고 형식의 매임이 없다.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저 혼자 그 일에 빠져든다. 스트레스가 없다. 일이, 일이 아니고 휴식이다.

인생을 살아봐서 알지만 쓸데있는 일만 가치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쓸데없이 놀고 허비하는 듯한 시간도 가치 있다. 쓸데없는 일이란 쓸데있는 일의 보이지 않는 배후와 같다. 사람이 태어나 쓸데있는 일만 한다면 미쳐버리거나 확 돌아버릴 것이다.

 

 


“빈둥대지 말고 공부 좀 하지.”
어린 딸아이를 다그치자, 지켜 보던 늙으신 어머니가 한 말씀 하신 기억이 난다.
“빈둥대는 것도 다 인생 속에 들어 있는 거다. 놔둬라.”

맥없이 노는 것이 쓸데없는 일 같아도 그렇지 않다. ‘쓸데있는 일’과 함께 우리의 인생을 기름지게 하는 또 하나의 배경이며 윤활유임을 사람들은 모른다.

 

(2010년 8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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