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 연재 칼럼

세상살이에 대한 그리움

권영상 2013. 7. 24. 15:47

 

 

 

 

 

세상살이에 대한 그리움

권영상

 

 

 

 

지난 달 수요일 오후였다.

저녁 수저를 놓고 일어서는데 전화가 왔다. 강릉이었다. 큰댁 종형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비보였다. 종형수면 사촌 형수님이시다. 가까이 살면 당연히 문상을 가야하는데, 먼 거리이고 보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전 같으면 당장 내려가 심야버스로 되짚어 오면 된다. 그러나 암만 계산을 해도 서울 도착 시각이 새벽 3시 쯤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엄두가 안 났다.

그럴 때쯤 이번에는 누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망설일 것 없이 얼른 내려가라고 재촉이다. 그 형수님이 어떤 형수님인데 머뭇거리고 있느냐고. 나는 어렵게 직장에다 입을 떼어놓고 그 길로 버스를 탔다. 단오가 시작되는 터라 통행량이 많을 것 같아 그 길을 택했다. 생각과 달리 버스는 쉽게 영동고속도로의 끝을 향해 달렸다.


 

 

버스가 대관령쯤에 다다를 때다.

캄캄한 어둠속에 묻혀 있던 대관령의 산과 나무와 산기슭에 앉은 민가의 불빛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 무렵이다. 무심하던 내 안의 눈물 한 점이 흘러내렸다. 이게 괜한 눈물일까. 맥없이 또 흘러내렸다. 예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비보를 듣고 이 대관령을 황급히 넘었다. 어머니 우환이 위중하단 연락을 받았을 때도 서둘러 넘던 길이 이 대관령이다. 고향을 강릉에 두고 타지에 나가 사는 사람들치고 이곳을 통하지 않고 강릉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종형수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시집을 오셨다. 일제가 우리를 통치하던 그 엄혹한 시대의 말기에 종형님을 잃었고, 그 나머지 평생을 종가의 며느리로 고독하게 사셨다.

아버지 형제분이 모두 넷인데 그 사촌만도 십여 명이 넘는다. 늦은 밤 상가에 도착해 문상을 마치고 났을 때다. 이미 취기가 도신 사촌 형님 한 분이 농삼아 내게 말했다.

“오늘로 우리 사촌 중에 내가 세상을 뜰 세 번째 차례가 됐다.”

그랬다. 그 형님의 바로 손 아래 나이가 나니까 그렇다면 나는 네 번째다. 은근히 세상을 살아온 내 나이를 되짚었다. 내 나이가 아, 그렇게 되었다.


 

 

다음 날, 장지에서 일을 보고 혼자 남대천 단오터에 갔다. 거기를 좀 가보고 싶었다. 누가 나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이 그랬다. 나는 혼자 땡볕을 걸어 굿당이며, 투호장을 기웃거렸다. 묵은 책 가게 앞을 지나 꽹과리소리에 이끌려 농악경연장에 다다랐다. 홍제동 농악팀의 농악이 한창 절정의 고비를 넘기느라 숨막히게 리듬을 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한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날라리(태평소)의 고음과 꽹과리의 화려한 금속음이 농악터를 태워버릴 듯이 달구었다.

그때였다. 내 눈에 언뜻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다. 소고를 잡은 패들이 허리를 잘숙이며 또는 몸을 솟구치며 열연하는 모습이었다.

 

 

까닭모를 눈물이 거기에서 욱, 하고 솟았다. 보잘 것 없는 악기를 든 소고패들의 잘숙잘숙 허리를 잘숙대는 모습에서 나는 대체 무엇을 보았을까. 고단한 삶을 살다가신 어머니를 보았던 걸까. 뜨거운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 나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눈물 범벅이 되도록 울었다. 그건 장지에서 울지 못했던 눈물 같기도 하고, 부모님 안 계시는 세상에 대한 허전함 같기도 했다. 남들 다 흥에 겨워 추임새를 넣고 박수를 치는, 어쩌면 가장 신바람 나는 그 절정의 지점에서 나는 왜 범벅이 되도록 눈물을 흘렸을까. 살아온 나이가 부리는 추태인가, 아니면 세상살이에 대한 아득한 그리움인가. 살수록 참 모르겠는 것이 인생이다.


(교차로신문 2010년 7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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