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잠 재우는 자장자장 자장노래
권영상
당인리 화력발전소가 창밖에 보이는 그분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공부한 그 당인리 발전소 근처다. 이층에 있는 그분의 사무실에 앉아 출판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권선생님, 이거 좀 보세요.”
그분이 보여줄 게 있다며 자신의 컴퓨터 앞으로 나를 이끌었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귀엽게 생긴 사내아기가 있다. 얼굴이 통통하고 눈이 부리부리하다.
“우리 손자 녀석이에요.”
그분이 그랬다.
그분은 우리나라 동식물을 알기 쉽게 사진 위주로 편집하여 출판하는 출판사 대표이다.
“야, 정말 귀엽네요. 이 초롱초롱한 눈 좀 보아요. 총명해 보이네요.”
나는 그의 손자라는 말에 좀 오버했다.
“6월 20일이 백일이었으니 이제 열흘 지났어요.”
그러니까 백일 지난 손자 녀석을 자랑하고 싶어 나를 이끈 거였다.
남의 손자이긴 해도 혼탁한 마음이 샘물처럼 맑아질 만큼 예쁘고 귀여운 녀석이다.
그분은 손자가 옹알옹알 말 연습을 벌써 한다느니, 혼자 웃고, 혼자 소리치고, 혼자 울고, 한다며 감정표현이 어쩜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있느냐며 흥분했다. 그러면서 때로는 아들네 사정 때문에 자신이 반나절, 또는 밤 시간대에 아기를 돌볼 때가 있다고 했다.
“요즘 애들 참 안 자요.”
아기 잠 재우기를 하느라 그 분은 자장노래를 하나 외고 있었다.
은자동아 금자동아 천지 건곤 일월동아
칠보 천금 보배동아 채색 비단 오색동아
수명장수 부귀동아 은을 주면 너를 살까
금을 주면 너를 살까 국가에는 충성동이
부모에는 효자동이 동기간에 우애동이
일가친척 화목동아 동네에는 유신동이
태산같이 굳세어라 악대같이 실하여라
하해같이 깊으거라, 유명 천하 하여보자
“이렇게 좋은 자장가가 있는 줄 처음 알았어요.”
제법 긴 자장노래를 다 외고 나더니 내게 싱긋 웃어보였다.
“저도 처음 듣습니다.”
나도 그런 자장노래는 처음이었다. 자식에게 들려줄 덕목이 다 들어 있는 완벽한 내용이다. 자식이란 금으로도 은으로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다. 하늘이 점지하여 내려주신 자식이라 아무쪼록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염원이 담겨있다. 그러면서 나이를 먹어 성장하되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 있고, 굳고 깊은 뜻을 세워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라는 내용이다. 입신양명을 염원하는, 유교 국가 이념에 딱 맞는 자장노래다.
이런 자장노래들이 대체로 언제 만들어졌을까.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어쩌면 이 세상에 부모 있고 자식 있을 때부터 만들어졌겠다.
위의 노래는 유교적 이념을 담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야 기본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을 테니 지금도 통용되는 듯하다. 할아버지한테 이런 자장노래를 듣고 크는 아기는 그 나름대로 행복할 것 같다.
나는 그분과의 일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다.
어머니한테 자장노래를 들어본 기억이 내게는 없다. 그야 당연하겠다. 자장노래는 두어 살짜리나 그보다 조금 더 큰 아기에게 해당되는 노래다. 그러니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내게 자장노래쯤 안 불러주셨을 리 또한 만무하다. 이 사람 저 사람 부르던 화전가를 필사해 외어 부르시고, 소설 박부인젼이며 임진록도 내게 수 없이 들려주셨으니 자장노래도 분명 들려주셨을 성 싶다. 자리에 뉘여놓고 보아도 자식은 소중하고, 들쳐 업고 보아도 아까운 게 자식인데 잠투정하는 자식을 못 본 체 그냥 두지는 않으셨겠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어떤 자장노래를 들려주셨을까.
머리끝에 오는 잠 슬금슬금 내려와
눈썹 밑에 모여들어 껌벅껌벅 스르르르
귀밑으로 오는 잠 슬금슬금 내려와
눈썹 밑에 모여들어 껌벅껌벅 스르르르
우리 언나 잠을 드네 쌔근쌔근 잠드네
워리워리 짖지마라 우리 언나 잠드네
코끝으로 오는 잠 엉금엉금 기어 와
눈썹 밑에 모여들어 껌벅껌벅 스르르르
입언저리 오는 잠 엉금엉금 기어 와
눈썹 밑에 모여들어 껌벅껌벅 스르르르
우리 언나 잠드네 쌔근쌔근 잠드네
꼬꼬꼬꼬 울지마라 우리 언나 잠드네
뭐 이런 노래가 아니었을까.
이 노래는 강원도 양양지방에서 채록되었으니 어머니 나셔서 자라신 곳이 거기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자장노래 중에서도 문학성이 짙다. 앞서 출판사를 경영하던 분의 자장노래가 지나치게 유교적 이념 중심의 노래라면 이 노래는 아기를 잠재우는 일에 충실한 노래다. 앞의 노래가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어달라는 부모의 의도가 강하게 드러난 주문형 노래라 하면 이 노래는 그런 의도가 배제된 순수한 서정적인 노래다.
내용도 재미있다. 몸 바깥 어딘가에 있는 잠은 머리끝으로, 귀밑으로, 코 잔등으로, 입 언저리로 살금살금 걸어와 눈썹 밑에 모여 마침내 아기를 잠들게 한다는 발상이다. 아기가 잠을 자는 마당에는 멍멍개도 있고 꼬꼬닭도 있다. 이 노래의 배경에 농경문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쯤 노래를 부르면 아기는 노래에 실린 운율에 취해 스르르 잠 들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가슴을 도닥도닥 도닥여주던 엄마 손도 차츰차츰 그 세기가 작아지면서 마침내는 조용히 손을 뗄 테다. 그렇게 가만히 손을 놓는 순간, 아기는 그걸 알고 또 한 번 칭얼댄다. ‘눈썹 끝에 오는 자암.’하고 작은 소리로 도닥여 주면 아가는 이내 꿈나라로 들어갈 테다.
어머니 젊으셨을 적에 우리 집에 오셔서 당신의 손녀인 내 딸아이를 잠재우신 적이 있다. 딸아이는 좀 해 잠을 안 잤다. 아내도 직장이 있는 관계로 딸아이는 낮이면 저의 이모 손에서 컸다. 그리고 퇴근을 하면 비로소 우리 집에 와 우리와 함께 했다. 그러니 자정이 넘도록 잠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 무렵, 어느 일요일에 어머니가 딸아이 가슴을 도닥이며 불러주시던 자장노래가 대충 기억난다.
자장자장 우리 나래
천금 같은 우리 나래
천지간에 중한 목숨
부모 위해 힘써보자.
자장자장 우리 나래
우리 나래 잘도 잔다.
자장자장 우리 나래
보배 같은 우리 나래
천지간에 중한 목숨
형제 위해 힘써보자.
자장자장 우리 나래
우리 나래 잘도 잔다.
어머니가 부르시던 자장노래는 간편하다. 외기도 쉽다. 말만 바꾸어 가면 하루 이틀도 노래 부를 수 있다. 핵심은 ‘천지간의 중한 목숨’이다. 그 목숨을 부모 위해, 형제 위해, 가정 위해, 가문 위해, 나라 위해, 나를 위해 힘써 보자고 하면 된다. 어머니 연세가 있으시니 이 노래 속에도 유교적인 냄새가 얼핏 난다.
어머니는 무속의 사설도 한두 번 들으시면 그대로 엮어낼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름대로 구전을 응용하는 힘도 있으셨으니 이 노래도 어머니가 그냥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부른 게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다.
나도 잠자기 싫어하는 딸아이를 위해 당연히 자장노래를 사용했다.
아주 흔한 노래였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우리 아가 잘도 잔다
꼬꼬 닭아 우지마라
우리 아가 잠을 잔다
멍멍 개야 짖지마라
우리 아가 잠을 잔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니고, 어디서 들은 것도 아니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모두 알게 모르게 들어온 것을 조합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 몸 깊이 흘러오던 우리 전통의 노래였다. 내 몸에 깊이 흘러왔다는 건 나도 이 노래를 어머니로부터 들어왔다는 뜻이다.
딸아이는 정말 잠이 없었다. 맞벌이 부부를 부모로 택하여 태어났으니 자정이 넘어도 눈은 오히려 대낮처럼 초롱초롱했다. 오직 부모와 같이 놀려고만 했다. 자정이 되어도 자지 않으면 잠을 재우려고 아기를 업고 깜깜한 동네를 돌았다. 자는 듯해 얼른 집에 들어오면 어떻게 아는지 번쩍 눈을 떴다. 그 때에 내가 만들어 부른 자장노래가 있다.
자장자장 우리 나래
얼른 얼른 잠들어라.
내일 아침 찌찌 주마
내일 아침 까까 주마.
자장자장 우리 나래
밤은 깊어 자정이다.
자장자장 우리 나래
어서 어서 잠들어라.
내일 아침 책을 주마.
내일 아침 인형 주마.
자장자장 우리 나래
내일 출근 시켜다오.
아기가 잠을 잘 자지 않으면 잠 재우는 어른은 고역이다.
잠을 안 잘 때면 유모차에 아이를 뉘여서 거실 이쪽 편에 내가 앉고 저쪽 편에 아내가 앉아 유모차 굴려 보내기를 했다. 그냥 굴려만 보내면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질까봐 이런 자장노래를 덧붙여 지어 불렀다.
그렇게 30분 40분 부르다 보면 아이보다 어른이 먼저 지친다. 꾸벅꾸벅 졸다가 졸다가 우리 세 식구는 제 풀에 쓰러져 그냥 거실에서 자는 날이 많았다. 그러느라 실제로 출근이 늦어 아침이면 허겁지겁 골목을 뛰어나가곤 하던 일이 엊그제 같다.
그때 우리들의 지친 심경이 그대로 자장노래 속에 노출되어 있다. 자장노래라기보다 자식 하나 간신히 키워내는, 철없는 부모의 하소연 같기도 해 웃음이 절로 난다.
그런데 요 얼마 전이다.
모 출판사에서 “토닥토닥 아기 잠 동시”라는 책을 내겠다며 자장노래 몇 편 써 달래서 써 준 적이 있다. 그 중 '요기 앉아서'라는 자장노래다.
우리 아기 잠드는 얼굴
엄마가 지켜볼게.
한 걸음도 떼지 않고
요기 앉아서
솔솔 잠드는 얼굴
지켜봐 줄게.
우리 아기 잠드는 소리
엄마가 엿들어 줄게.
한 발짝도 가지 않고
요기 앉아서
콜콜 잠드는 소리
엿들어 줄게.
아기는 하루 종일 엄마와 같이 놀고, 엄마와 같이 이야기하고, 엄마와 같이 젖 먹고, 엄마와 같이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런 아기라면 심신이 안정되고, 엄마와의 소통과 교감 또한 충분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기들은 불가피하게 부모와 오랜 시간을 같이 할 수 없다. 그런 아기들을 안정시켜주기 위해 이 자장노래를 만들었다.
우리 딸아이처럼 낮에는 다른 이의 손에 크고, 밤이라야 엄마와 함께 있는 아기들이 세상에는 많다. 그 아기들은 잠자는 동안 엄마가 자신 곁을 떠나갈까 그게 걱정이다. 내가 잠자는 사이 엄마가 사라지면 어쩌지? 아기들에겐 그게 생존을 위한 최대의 걱정일 수 있다. 그걸 나는 착안했다. 엄마가 잠자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봐 주겠다는 안도감을 주려고 했다.
자장노래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이 바뀌었다.
과거의 자장노래에 자식에게 거는 부모의 이상적인 기대가 담겨 있다면 지금의 노래는 그런 부담보다는 정서적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정서적으로 충만한 잠을 통해 아기는 유교적이며 획일적 인간형보다는 자유롭고 활달한 꿈을 갖는 인격으로 성장할 것이다.
내가 내 딸아이에게 들려주는 자장노래는 아기의 마음 속에 무형으로 흐르다가 이 다음 딸아이가 어른이 되면 자신의 핏줄속에 숨어 흐르는 노래를 꺼내어 그의 자식에게 전승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장노래는 구전문학이다. 구전문학은 창작이 쉽다. 당대 문화에 맞게 즉흥적으로 지어 부르기 쉬운 것이다.
내 아이를 위한 자장노래 하나쯤 지금 만들어 써보자.
‘자장자장 우리 아기’ 하면서.
3.4 또는 4.4조를 기본 운율로 하되 반복어를 많이 쓰면 운율맛이 더 난다. 뭘 쓸까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 그때 그때 즉흥적으로 엮어나가다 보면 절로 문맥이 트인다. 자,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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