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이야기동시 연재>
이야기 바다에 빠지다
23. 아비지
아비가 오다
아비가 국경을 넘어 신라로 왔다.
그는 백제 사람으로
당대의 몇 안 되는 목탑 장인이다.
신라에 들어온 아비는 벌써 며칠째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기로 한
자리를 찾아 앉아도 보고 서도 보고 누워도 본다.
황룡사는 진흥왕의 명에 의해 세워진 사찰로,
백제의 미륵사와 고구려의 정릉사에 뒤지지 않는
거대한 절이다.
선덕여왕은 이 웅장한 황룡사 대웅전 앞뜰에
9층 목탑을 세워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것을 위해 아비를 불렀다.
아비는 황룡사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 골목길을 돌다가,
또는 마을 산언덕을 오르다가
밭에서 씨앗을 뿌리다가 문득 바라보게 될 9층 목탑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고 돌아오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문제는 찰주야.’
찰주란 탑을 지탱하기 위해 세우는 중심 나무 기둥이다.
찰주를 바로 세우면 탑도 찰주를 따라 천년 만년을 간다고 했다.
아비는 찰주 감으로 준비된 나무들을 살피고 다듬느라 또 몇 날을 보냈다.
꿈
이제 내일이면 찰주를 세우는 날.
아비는 창문 밖까지 밀려온 캄캄한 어둠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9층 목탑은 신라의 주변 나라인 아홉 나라를 부처님의 힘으로 누르고 평화를 얻으려고 짓는
신라의 대역사다. 근데 그 아홉 나라 중엔 자신의 나라 백제도 있었다.
이 탑을 세우면 자신의 나라가 위태로워질지도 모를 일.
그날 밤, 아비가 꿈을 꾸었다.
고국 백제의 사비성이 불타고 있었다.
불길했다.
‘9층 목탑에서 손을 떼야겠구나.’
꿈인데도 아비는 중얼거렸다.
지진이 나고 큰비가 내리면서 컴컴한 어둠속에서 한 노승과 장사가 황룡사 금당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들은 아비가 세우려 한 찰주를 찾아 우뚝 세우고는 사라졌다.
천둥소리에 깨어난 아비가 문을 열었다.
바깥에도 큰비가 내리고 있었다.
‘꿈에 찰주가 서는 걸 보니 이제 백제의 기운도 다 한 듯 하구나.’
아비는 백제의 운이 다 한 걸로 판단했다.
아침부터 아비는 간밤의 꿈을 잊고 일터에 나가 목탑 세우는 일에
전념했다.
부처님의 뜻을 담아내는 일
황룡사 9층 목탑은
643년 선덕여왕 2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율사의 건의에 따라
건립하게 되었다.
그때 신라의 책임자는 김용춘이었다. 김용춘은 미추왕의 아들이며
장차 태종 무열왕이 될 김춘추의 아버지다.
그는 이 목탑을 지을 장인으로 백제의 아비를 선택했다.
“마마, 아니 되옵니다. 이건 이찬 김용춘의 실책이옵니다. 하필 적국의 장인이라니요!”
또 한 대신이 나섰다.
“백제에게 대야성을 빼앗긴 치욕을 벌써 잊으셨나이까.”
또 한 대신이 나섰다.
“마마, 이찬을 이 중대한 일에서 손 떼게 해야 하옵니다.”
대신들이 차례로 나서서 그 불가함을 왕에게 아뢰었다.
김용춘이 조용히 나섰다.
“마마, 대신들께서 지적하신 말씀은 틀림없이 모두 맞나이다.
그러나 탑을 세우는 진실한 의미란
이것은 안 되고 저것은 된다는 분별을 넘어서는
부처님의 뜻을 담아내는 일 아니겠나이까. 마마,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소서.”
왕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이찬의 고귀한 뜻을 따라 주시오.”
왕이 대신들을 다독였다.
왕은 이찬 김용춘이 목수 2백 명의 도움을 받도록 허락하였다.
탑이 솟아오르다
그 후, 일은 착착 진행되어 갔다.
탑을 세울 터를 다지고, 탑을 올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크고 늠름한 참나무로 찰주를 세웠다.
계획한 대로 착착 지붕이 올라가면서
탑은 솟아올랐다.
황룡사 경내가 다 보였고, 황룡사 너머 경주의 궁궐이며 길거리가 환히 보였고
남산의 봉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드디어 선덕여왕 12년 643년에 짓기 시작한 9층 목탑은
14년 645년에 완성되었다.
“그동안 수고하셨소. 그대들 덕분에 이제 우리 신라는 외침으로부터 평화롭게 되었습니다.”
왕이 친히 황룡사로 납시어
아비와 김용춘, 그리고 함께 도운 200여 명의 목수들을 격려했다.
그날 밤, 완공 축하를 위한 연회를 마치고
아비는 숙소로 돌아와 백제에서 가지고 온 책이며 옷가지를 챙겼다.
밤이 이슥해지자, 아비의 머릿속에
찰주를 세우기 전날 밤에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그때 백제의 사비성은 불타올라 잿더미 속으로
영영 사라졌다.
나라가 망하여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아비는 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함께 온 장인들과 고향으로 가는 길에 올라섰다.
산 언덕 길에서 아비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멀리 황룡사 9층탑이 구름에 높이 닿아 있어 하늘로 올라간 황룡이
탑을 휘감으며 이 땅으로 내려오는 듯
눈부셨다.
“신라가 평안하게 하여 주소서.”
아비는 한참 동안 두 손을 모으고
그 탑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그리고는 산언덕 너머로 천천히 걸어내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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