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로가 사라졌다

젤로가 사라졌다 26회 - 솔거

권영상 2025. 2. 10. 12:11

<월요 이야기 동시 연재>

 

이야기 바다에 빠지다

 

22. 솔거

 

 

산골짝 끝집에서 태어난 아이

 

 

산골 마을 끝 집에

눈먼 더벅머리 사내가 살았다.

그에겐 늙고 병든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가 어머니를 봉양했다.

그는 하루 종일 일했고

하루에 두 차례 해 뜰 무렵과 해 질 무렵

마을 근방 어느 절에 계신다는 부처님을 향해 염원했다.

“부처님, 아픈 어무이를 살려주소서.”
그의 염원은 하도 간절해

들짐승들이 먹을 것을 물어주고

날짐승들이 약에 쓰일 열매를 먼 산에서 따다 주었다.

그 사내의 이름이 솔거였다.

솔거는 종일 일하고, 부처님께 염원하고, 그러고도 하는 일이 하나 더 있었는데

깨어진 사금파리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는 앞을 볼 수 없지만 자신이 그리는 그림만은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깨끗한 마음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미천한 네가 처지에 맞지 않게 그림은 웬 그림인고?”
어쩌다 지나가는 마을 사람이 솔거를 만나면 그렇게 혀를 찼다.

“어무이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서지요.”
솔거의 대답처럼 그의 어머니는 병석에 누웠다가도 가끔 일어나면

아들이 그린 그림을 보러 마당에 나오곤 했다.

“배운 적 없는 그림을 잘 그리누나.”
솔거는 한번도 본 적 없는 호랑이를 그리고, 당나귀를 그리고

푸른 솔바람을 그리고, 풀잎에 숨어 우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그렸다.

때로는 꿈에 본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황룡사가 다 지어지다

 

 

진흥왕 27년

황룡사가 완공되었다는 소식이 바람결에 들려왔다.

황룡사를 짓기 시작한 이야기는

어릴 적 솔거가 어머니 무릎에 누워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나라 임금이 지으려는 궁궐터가 하필이면 물이 고인 늪이었다.

흙을 퍼다 늪은 메우고 바위를 져다 늪에 밀어 넣을 때다.

천둥 치고 비 내리는 날 늪에서 황룡이 솟구쳐 나와

하늘로 날아올랐다.

“기이한 일이로고.”

왕은 궁궐 짓는 일을 미루고 그 자리에

부처님 모실 절을 지었는데

무려 17년이 걸릴 만큼 크고 웅장하였다.

그 절 이름이 황룡사였다.

백제에 미륵사가 있고, 고구려에 정릉사가 있다면 신라에

당연히 이 황룡사가 있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는 모두 솔거의 어머니가 들려주거나

더욱 자세한 것은 지나가는 바람이거나

개울물이 들려주었다.

 

 

노송을 그리다

 

 

마당귀에 선 살구나무에 꽃이 피고 있을 때다.

“솔거 있느뇨?”

이웃 어른 한 분이 솔거네 안마당에 들어섰다.

솔거가 문을 열고 마당을 더듬어 나왔다.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 눈이 먼 네게 가당한 일인지 모르겠으나.”

어른이 머뭇거렸다.

“어르신, 대체 그 소식이란 게 뭐지요?”
솔거가 그 분을 향해 귀를 쫑긋 모았다.

“황룡사 벽에 그림을 그릴 사람을 찾는다는구나.”
그 말에 솔거는 그만 힘없이 중얼거렸다.

“웅장하기로 이름나다는 그 절에 저처럼 미천한 산골짝 끝 집에 사는 눈먼 사람이라.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네요.”

“나도 그렇긴 하다만.”
마을 어른은 헛기침을 하며 사립문 밖을 나갔다.

그러나 그 일은 솔거가 하루도 빠짐없이 부처님께 염원을 드린 공덕 때문이었을까.

며칠 뒤, 황룡사에서 제일 가는 분이 왕명이라며 찾아와 솔거를 데리고 갔다.

“부처님이 너를 원하신 것 같구나.”
그날부터 솔거는 황룡사 부처님 계시는 대웅전의 벽을 찾아가 그 앞에 섰다.

벽은 얼마나 큰지, 그 큰 벽에 무얼 그려야하는지,

그리고 산에서 들에서 나는 풀과 나무와

돌을 찾아 거기서 물감을 얻어

꼬박 석 달만에 벽의 크기에 알맞게 노송을 그렸다.

여름 날 부처님이

더위를 참지 못하여 조을다가 대웅전을 나오시면

그때 쉬시기 좋도록 커다란 노송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솔거는 마치 눈이 밝은 사람처럼,

신들린 사람처럼 붓을 든 손에 모든 걸 맡겼다.

그림을 다 마친 이튿날이었다.

대웅전 노송 그림 앞에 모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림 속 노송이 절마당에 그늘을 펼치다니, 예사로운 그림이 아니구만.”
“그림이 아니라 이건 살아있는 소나무일세.”

솔거의 노송도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새들이 날아오다

 


아침 일찍, 아직 아침 공양을 알리는 종소리가

사찰 경내에 울려 퍼지기 전이었다.

절을 한 바퀴 돌던 노스님이 솔거가 그린 노송도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노송에서 바람이 불어 나오누나.’

노스님이 입고 있는 웃옷의 끝단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이상한 일이로다.’

노스님은 대웅전 뒤뜰에 서 있는 나무들을 살폈다.

바람 한 점 없는 아침이었다.

그때였다.

툭, 하는 소리가 노송도 흙바닥에서 났다.

솔방울이었다.

노스님이 다가가 솔방울을 주워들고 그림 속 노송을 쳐다봤다.

솔방울이 달려 있었음직한 가지 끝 솔잎이 언뜻 흔들리다가 멈추었다.

노스님이 솔방울을 든 채

천천히 저쪽 절마당으로 내려가셨다.

비가 오는 날이면

새들이 비를 피해 노송을 향해 날아오고

노을이 질 무렵이면

하룻밤 잠을 청하러 새들이 날아오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엔 대웅전 부처님께서 오줌을 누러 나오시다가

노송이 펼쳐주는 시원한 그늘에 앉아 쉬시는 걸

이 절의 착한 누렁개가 보았다.

그때 누렁개는 부처님 곁에 슬그머니 다가가 앉아

함께 더위를 식히곤 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