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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로가 사라졌다 (연재 16)

이야기의 바다에 빠지다   12. 유화부인  압록강 가의 봄  강물엔 신이 살았다.물을 다스리는 신, 하백.수선화가 피는 하백의 집엔 예쁜 딸이 셋 있었다.하유화, 하위화, 하훤화.“봄볕이 고우니 어디든 나가 놀다 오렴.”아버지 하백은 딸들에게 파랗게 흐르는 압록강의 봄을 보여주고 싶었다.유화는 동생들을 데리고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가로 나갔다.치마를 걷고 강물에 들어서서발을 씻고 있을 때다.건장한 청년 하나가 수선화 피는 강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그는 강을 건너와 유화 앞에 섰다.금방 꺾은 수선화 꽃묶음을 건넸다.“나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요.”청년의 말소리가 봄풀 같이 풋풋했다.“알고 있다오. 북부여의 가장 멋진 남자라는 것도.”유화의 말에 청년 해모수가 빙그레 웃었다.유화가 자기 소개를 했다.“..

할머니의 손

할머니의 손권영상  내가 아플 때할머니는 사과 속을 긁어주셨지. 잠자리에 누운 나를 앉혀놓고숟가락으로사각사각 사과 속을 긁으시던 손. 아, 하렴!이윽고 달콤한 사과속을내 입에 넣어주실 때나는 간신히 받아 꼴깍, 넘겼지. 꼴깍! 그 소리에할머니는 내가 살아있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오올치! 하시며사과속이 묻은 내 입가를 훔쳐주셨지.   2024년 14집

가을은 혀 끝에서 온다

가을은 혀 끝에서 온다권영상  마당에 길고양이가 눈 똥을 치우고 있는데 어휴, 하며 옆집 수원아저씨가 뭘 한 상자 들고 오신다."안녕하세요? 뭘 이렇게 안고 오세요?"추석 명절 쇠고 수원 아저씨를 오는 처음 뵙는다.우리는 명절이 가까이 오면 그 전에 명절 선물을 서로 주고 받아왔다.그러고 오늘 처음 안성으로 내려왔다. 추석 연휴가 지난 뒤라 명절을 깨끗이 잊고 내려왔는데 수원 아저씨는 그 동안 내게 뭘 더 주실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금 더 드리고 싶어서요.”데크 난간에 들고온 상자를 어휴, 하며 올려놓았다.봉지째 따오신 포도다.“예. 포도 좀 하고요. 산책하며 주운 밤 좀 하고, 포도밭에 심은 땅콩. 요 얌전한 봉지 속이 궁금하시죠? 짧은 제 실력으로 키운 배 두 알이에요.”수원 아저씨..

《올해의 좋은 동시 2023》해설

《올해의 좋은 동시 2023》해설    풍요롭고 다채로운 동시 읽기권영상   《올해의 좋은 동시 2023》역시 지난해처럼 새롭고 신선하고 다채롭다.젊은 시인들의 시일수록 더욱 그렇다. 표현의 자유로움과 다루고자 하는 세계가, 이를 테면 짧고 간결한 문장으론 다룰 수 없는 영역으로의 초대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 그것은 아마 다양한 직업군, 동시 창작자로서의 당당함, 시의 바깥에서 중심부로 진입해 들어오는 적극성과도 연관이 있겠다.시에 집중하지 않으면 시가 말하려는 것에 가 닿기 어려운 점, 우리 동시가 깊은 통찰의 산물이 되려하기보다 가벼운 쪽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나 하는 우려 등이 초기엔 없지 않았다.하지만 올해의 동시를 일별하면 시력이 풍부한 시인들은 나름대로 동시의 본성을 살리면서 시를 더욱 친근하고..

문학비평 2024.09.23

연작시 <산수유꽃>

산수유꽃권영상1. 경사리 산수유분이야, 봄이 왔더레이. 경기도 광주군 백사면 경사1리, 643미터 원적산 산 아래 마을로 봄이 한창 왔더레이. 와도 참 억수로 왔더라. 소복히 사는 오십 호 쪼깐한 안마당과 비좁은 밭둑길, 밋밋한 산비탈로 와도 와도 참 오달지게도 왔더라. 전투 비행기가 마음먹고 탕, 던져버린 폭탄 있지 않느냐? 그 폭탄 터지느라 풍기는 독한 화약 연기처럼 산수유꽃 뭉게뭉게 마을을 덮었더레이. 향기는 또 얼마나 진하더냐 하면 말이다. 분이 네가 추운 독감으로 아스피린 먹고 밤 새워 어릿어릿하던 때 있었지? 그때 깜물 맡았다던 옛 일기장에 밴 매운 향기, 그 향기 같더라. 새삼 놀란 것은 봄이 와도 딴 데는 모두 두고 경사리만 딱 요렇게 골라오시는지, 몰라도 참말 모를 일이더레이.2. 산수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