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를 기다리며
권영상
텃밭에 파프리카를 심었다.
한두 포기도 아니고, 첫 작물치고 열한 포기나 심었다. 아삭고추 열네 포기와 합치면 적지 않은 양이다.
쪼끄한 텃밭에 별별 작물을 다 심어본다. 처음 안성에 내려올 땐 가볍게 상추 쑥갓 고추 정도 심으며 살리라 했다. 그러다가 감자 조금, 대파 조금, 배추 조금 무 조금, 강낭콩 조금, 콩 조금. 이렇게 가짓수가 늘어났다. 주로 내가 잘 알고 낯익은 작물들이다.
그렇게 한 3년쯤 지나자, 그 일이 무료해졌다. 잘 아는 방식으로 반복하는 농사에 흥미를 잃으면서 낯선 작물을 하나 둘 끼워넣기 시작했다. 그 첫 작물이 토란과 순무다. 처음 대하는 작물들이라 우선 공부부터 했다. 토란과 순무 재배 경험이 있는 영남이거나 강화 쪽 사람들과 이들 작물에 대한 정보를 들으면서 내가 점점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때 재배했던 토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을지로 5가 종묘사에서 토란 두 봉지를 사다가 네 고랑에 나누어 심었다. 얼마나 정성스럽게 가꾸었는지 토란대가 내 키를 훌쩍 넘어 집 처마에 닿을 정도였다. 연잎처럼 커다란 잎과 쭉쭉 뻗어오른 토란대들, 우거진 밀림 같았다. 고랑을 둘러가며 지주대를 박고 쓰러지지 못하게 끈으로 묶었다.
토란을 재배하는 일이 멋있고, 흥미로웠다. 거기다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건 토란꽃이다. 내게 도움을 준 이들도 토란꽃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파초꽃을 닮았다. 그리고 그해 가을, 토란을 캐면서 발견한 말이 있다. 알토란이다. ‘알토란 같다’는 말을 쓰면서도 그 어원을 잘 몰랐는데 알토란을 텃밭에서 찾았다. 토란 원뿌리. 조금만 껍집을 벗기면 이내 나오는 속살 가득한 부분. 그 부분이 버릴 거 하나 없는 알토란이다.
말로만 듣던 강화 순무도 작황이 너무 좋았다. 이웃분들이 구경하러 오며가며 들러주는 바람에 쉽게 나누었고, 나누어 가는 이들의 감동하는 모습에 이 맛에 농사짓는구나 싶었다.
낯설고 새로운 작물에 흥미를 느낀 나는 그 이듬해, 대담하게도 마를 골랐다. 마 중에서도 보라마. 인터넷조차 보라마에 대한 정보가 없을 정도로 대중화되지 않은 작물이었다. 나는 마씨를 배송해준 분과 몇 차례 통화하며 가꾸었다. 덩굴식물이라 성장이 시시각각 눈에 보이는 너무도 매력적인 작물이었다. 그러나 보라마 소득은 별로였다.
어느 해 1월, 제주 모슬포 오일장에서 아내가 발견한 게 있다.
제주독새기콩인 푸렁 콩이다. 그걸 씨종자로 샀다. 콩은 우리나라가 원산지라는 것과, 우리의 재래종 난쟁이콩이 6.25 동란 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개량되어 지금 우리나라로 역수출되고 있다는 것도 알았고, 무엇보다 크게 얻은 건 우리 전통 재래종 씨앗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점이다.
강황 정보를 얻은 건 그 다음해다.
백암 오일장에서 종자를 구했다. 도시에 눌러 살았더라면 듣도 보도 못한, 카레 향신료가 된다는 작물이다. 잎은 칸나를 닮았고, 알뿌리는 생강을 닮았다. 이 또한 시월쯤이면 잎 겨드랑이에 눈처럼 하얀 층층꽃을 피운다. 가을볕에 말리기 위해 알뿌리를 저밀 때 감동하는 것이 있다. 오리나무 목질처럼 샛노란 속살이다.
그들 말고도 내 호기심을 자극한 작물이 더 있다. 결명자, 산마, 비트, 멕시코 감자 히카마.
올 4월말 한창 모종이 바쁠 때였다.
강릉에 볼일을 보러간 아내가 모종가게에 들렀다면서 파프리카 모종을 사갈 거라 했다. 몇 포기거니 했는데 열한 포기를 안고 왔다. 빨강과 노랑 파프리카 모종 각 다섯 포기씩.
멋지고 화려한 작물을 아무 정보없이 키울 수 있을까 했는데, 재배 요령은 고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종한 지 2개월이 지난 지금, 주먹만한 파프리카가 주렁주렁이다. 1미터 가량 키가 크는 동안 계속 꽃 피고 꽃 지며 파프리카를 열고 또 익힌단다. 초록의 파프리카가 빨갛고 노란 색깔로 주렁주렁 변해가는 모습을 상상하려니 마음이 성급해진다. 얼른 8월이 왔으면 좋겠다. 아직은 다행스럽게도 병충해가 없다.
근데 놀라운 게 있다. 마트에서 산 파프리카를 조리한 후 그 씨앗을 혹시나 하고 아파트 베란다 화분에 심었다. 정직하게 발아가 됐다. 그걸 키워 좀 늦었지만 안성 밭 귀퉁이에 모종해 놓았다. 그들은 좋은 땅 나쁜 땅을 가리지 않는다. 잘 자라 지금 한창 꽃 피고 있다. 꽃 피고 50일 뒤 수확이 가능하다고 했으니 9월쯤 결실을 보겠다. 파프리카 중에서도 크고 길다란 키다리 파프리카다. 빨강 주황, 노랑, 보라. 네 가지다. 이들이 색깔별로 주렁주렁 익어갈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설렌다. 세상에 이런 재배 기회를 다 갖게 되다니.
낯선 작물과 만나는 일은 긴장되면서도 즐겁다. 그 때문일까. 지난 12년 동안 서울과 안성을 오가는 일이 무료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늘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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