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나는 너무도 호야꽃을 몰랐다

권영상 2025. 7. 6. 20:03

 

나는 너무도 호야꽃을 몰랐다

권영상

 

 

베란다 꽃병에 꽃 폈다.

꽃병은 꽃병인데 배부르고 커다란 유리꽃병이다. 꽃병에 꽃 폈다는 게 뭔 대수일까. 그러나 흙 화분의 꽃이라면 모르겠으나 물병에 눌러살던 식물이 꽃폈다면 좀 다르지 않을까.

“아이비에 물 갈아줘야겠는데.”

우리는 그 식물을 아이비라고 불렀다.

물 갈아준 지 오래되면 꽃병 안쪽에 파랗게 이끼가 낀다.

 

 

실내공기를 정화 시켜준다는 말에 방안에 들여놓고 창 쪽으로 덩굴을 올리던 그 아이비. 그 아이비가 언제 우리집에 왔는지 잘 모르겠다. 분명 우리 식구 중 누군가가 어디서 한 가지 얻어온 거겠다. 그걸 물을 채운 유리꽃병에 담가놓고 산 지 10여 년쯤 됐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자리는 베란다 창가다. 작은 항아리만한 유리꽃병에 한번 물을 채워주면 몇 달은 가니까 더 이상 건들 일이 없다. 그 곁에 체력 단련용 자전거를 세워놓고 딸아이가 운동하다가 결혼을 하여 가버리자, 혼자 남은 자전거. 아이비는 그 자전거 페달을 기어오르더니 또 언제 보니 일부는 안장을 향해 기어오르더니, 또 일부는 유리꽃병 아래로 몸을 늘어뜨렸다. 크는 속도가 느릿느릿하다.

 

 

우리에겐 투명 식물이나 마찬가지다.

창가가 그의 자리니 창문을 열었을 때 바깥바람을 좀 막아주기나 하는, 그 외에는 있으나 마나 한, 있어도 보이지 않는, 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옷장이나 신발장, 그것은 그쯤이었다. 덩굴줄기에 드문드문 마주 난 잎은 실리콘으로 만든 잎 모형처럼 두텁고 반들거린다. 어떤 잎은 초록이고, 어떤 잎은 미황색이고 또 어떤 잎은 반쪽은 초록이고 반쪽은 미황색이고, 또 어떤 잎은 테두리만 미황색이다. 이들이 우리에게 약간의 관심을 끄는 게 있다면 그것이 전부다.

그게 그들의 생존방식인 듯하다.

아무리 척박하여도 한 자리에 머무르면 그 자리를 오래도록 고수하는. 침묵의 이념을 가지되 숨결을 지닌 다년생 초본이다. 눈에 띄기를 꺼리는, 사는 내색을 하지 않는, 인기척 없이 고요히 한 자리에 은거하는 성자의 은신술을 닮았다면 지나친 걸까.

 

 

근데 요 며칠 전이다.

베란다 화분에 물을 주다가 얼핏 그 아이비 줄기 끄트머리에 달린 작은 부스러기들을 봤다. 나는 그게 어디선가 떨어진 마른 풀잎이거니 하고 말았다. 그후 안성에 내려가 닷새를 지내다 오늘 올라왔다. 아내가 나를 보자마자 베란다에 뭐 좀 달라진 게 있나 가 보라고 했다.

놀랍게도 아이비가 꽃 폈다.

그 말라붙은 풀잎이러니 했던 부스러기들이 꽃몽오리였다. 양산을 펼친 듯한 반원의 다발꽃인데 그 안에 별 모양의 작은 꽃들이 가득하다. 제 천성에 맞는 요란하지 않은 미황색 꽃이다. 앙증맞고 예쁘다. 코를 대어 본다. 있는 듯 없는 듯 향기조차 요란하지 않다.

 

 

식물이 꽃 피우는 일, 그거 당연한 일 아닌가.

하지만 흙 화분도 아닌 물병에 꽂혀 10여 년을 살아온 것이 꽃을 피운다는 게 몹시 낯설다.

나는 꽃 사진을 찍어 그의 정체를 인터넷에서 찾아냈다.

호야 카르노사(Hoya carnosa), 동남아와 오스트레일리아가 원산인 호야꽃으로 불리는 다년생 식물이다. 그걸 사람들은 모두 흙 화분에다 기르고 있었다.

 

 

아이비라 불리던 녀석은 1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렇게 제가 호야꽃임을 밝힌다. 자신을 알리는데 이만한 시간을 들이는 그의 느긋한 성품이 놀랍다. 그 사이 우리가 이사했거나, 어떤 연유로 그를 버렸다면 그는 우리의 기억 속에 아이비로 영원히 남고 말았겠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함께 살아온 호야꽃을 너무도 모르고 살았다. 우리들의 무심함 때문에 누군가를 오해하며 사는 이웃은 없었는지.....

호야꽃, 한 번 꽃 피기 어렵지 꽃 피면 이듬해 또 핀다고 한다.

호야꽃 덕분에 내년을 기약할 일이 생겨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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