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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내리는 3월 눈

권영상 2018. 3. 3. 07:52

느닷없이 내리는 3월 눈

권영상




3월인데 눈 내린다. 줄곧 기온이 영상을 유지했는데 난데없이 눈이라니! 눈도 눈도 참 지독히 내린다. 창문을 열고 내다본다. 눈발이 마구 방안으로 덤벼든다.

장기간 추위를 건너온 탓인지 눈은 내려도 마음은 벌써 봄쯤에 가 있다. 이 눈이 추위를 견딘 자에게 내리는 축복의 선물 같다. 눈을 찍겠다며 마당에 내려서며 보니 마당귀 뜰보리수나무 가지 사이에 까치 두 마리가 앉아 뜬금없이 내리는 눈을 비킨다. 나란히 붙어 앉아있다. 근방 어디에 집 하나를 짓다 말고 피신해온 부부까치 같다. 물끄러미 눈 내리는 들판을 건너다보고 있다.



까치들이 불편해 할까봐 휴대폰을 집어넣고 슬쩍 자리를 비킨다. 방에 들어와 창문을 열고 또 한 번 폭설을 내다본다. 눈은 여전히 휘몰아친다. 볼수록 아무 예고 없이 내리는 3월 눈이 좋다. 추위로부터 얼마간 벗어나 있다는 여유로움 때문이거나 이 폭설 때문에 잠시 갇혀있을 수 있다는, 무단히 느끼는 행복감 때문인 듯 하다.

지금 나는 안성에 내려와 있다. 집에서는 할 수 없는, 기한이 정해져 있는 몇 가지 일을 가져와 나흘째 머물고 있다. 내일이면 돌아가야 하는데 불안감보다 오히려 하루 종일 눈 내려 세상의 모든 길이 막혀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지지난 해엔가 눈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눈이 많이 쌓여서가 아니라 눈 쌓인 언덕길을 차가 오르지 못해 못 갔다. 어쨌거나 눈 탓에 떠날 일을 떠나지 못하고 하루 하고 반나절을 속절없이 갇히고 말았다. 기껏 하는 일이라곤 눈 그칠 때를 기다리거나 그 눈을 지루하게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참 모를 일이었다. 그런 시간이 차츰 좋아지기 시작했다. 좀체 생각해 본 적 없는 이웃집으로 가는 눈길을 치고, 어린 시절 이후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눈사람을 만들어 세우고, 편지를 들고 찾아온 젊은 우편배달 청년과 마루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오래도록 라디오를 듣고, 밤엔 불을 끄고 우련한 창밖 눈빛을 즐겼다. 심심해 보일 듯 한 이 일들이 차츰 내 머릿속을 맑혔다. 예고 없이 내린 눈 덕분이었다.



그런 경험 탓일까. 모처럼 제주도쯤에 발을 디딜 때면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한다. 느닷없이 태풍이나 한바탕 몰아쳐오기를. 열흘쯤 아니 한 달쯤 눈이라도 푹푹 쏟아지기를 바랄 때가 있다. 무단히 더 눌러있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그러니까 늘 부담을 떠안는, 현실 쪽으로 다가가고 싶지 않은, 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겠다. 좀 얌체 같지만 나 때문이 아닌, 내 의지와 달리 어쩔 수 없이 묶이게 되는, 그런 이변을 꿈꾸어 본다.



여객기란 여객기가 다 고장 나거나 누군가 여객선의 스크루를 다 뽑아가거나 여객기와 항구와 비행장이 다 사라진다거나. 마음씨 좋은 게릴라들에게 붙잡힌다거나, 야자수 섬에 내가 탄 비행기가 불시착한다거나, 그래서 한 열흘쯤 아니 한 달쯤 쉬게 되기를. 그러면서 바쁘다는 이유로 늘 미루고만 살아온, 그 어떤 미지의 일들을 느닷없이 만나보고 싶다. 엉뚱해도 참 야무지게 엉뚱한 생각이다.



난데없이 내리는 눈은 수명도 짧다. 눈보라 저쪽 하늘에 벌써 우련한 햇빛이 돈다. 라디오의 음악방송을 켜고 나와 보니 그 사이 그쳤다. 뜰보리수 가지에 은신해 있던 까치도 사라지고 없다. 모든 것이 불과 30분 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건너편 목수 아저씨네 집 굴뚝 연기가 아랫마을 쪽으로 꺾여날더니 바르게 일어선다. 봄이 코앞에 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