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개똥지빠귀

권영상 2018. 2. 21. 09:43




개똥지빠귀

권영상


 

산언덕에서 누가 길게 소리친다. 야아아아아-,

그의 목청에 숲이 먹먹해 한다. 산 아래 아파트들과 위압적인 고층 빌딩, 혹 그가 지나왔을지도 모를, 아니 그가 살고 있을지도 모를 도시를 향해 소리치고 있다. 어찌 들으면 비명 같기도 하다. 산에서 야호! 를 외치는 이들이 사라진지 오래 됐는데, 누군지도 모를 그 사내에겐 소리쳐야할 절박함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의 목소리에 외로움 같은뭔가가 답답한 심사가 배어있다. 대여섯 번쯤 소리치던 사내가 사라졌다. 숲은 다시 조용해졌고 숨죽이던 새들 울음소리가 또렷이 살아났다. 그 새들 중에 개똥지빠귀가 있다.



개똥지빠귀는 중앙시베리아나 캄차카 등지에서 번식을 하며 살다가 우리나라 일본 미얀마로 날아와 월동을 하고 가는 겨울철새다. 털빛이 낙엽에 가까운 갈색이거나 진한 갈색이다. 가슴과 배의 통통하고 갸름한 선이 멋있고, 훨출한 키에 다리마저 길어 한눈에 보기에도 잘 생긴 새다. 울음소리도 쪼르르쪼르르 예쁘다. 산도라지꽃 근처에 산도라지꽃 모여 살듯 개똥지빠귀 근처엔 개똥지빠귀들이 모여 있다. 철새라 꼭 여럿이 동행한다.



이들도 이제 날이 풀리면 북쪽으로 날아간다. 거기엔 그들의 풍족한 먹이가 있고, 번식하기 좋은 날씨가 있다. 그곳으로 돌아가려면 지금 충분히 먹어두어야 한다. 덩치 큰 고니나 기러기들은 밤에는 잠자고 낮에 이동하지만 몸이 작은 새들은 낮에도 밤에도 이동한다. 처음엔 축적한 몸안의 당분을 에너지로 전환하여 날고, 그마저 고갈 되면 지방의 힘으로, 그마저 고갈되면 단백질을 대사시켜 날아간다. 그마저 고갈된다면, 그 어딘가에 추락해 외로히 생을 마친다.



비둘기 머릿속에 미량의 자석이 들어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새들 머릿속엔 일종의 나침반이 있는 셈이다. 텃새는 그 나침반을 자신의 영역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쓰지만 철새는 다르다. 자신이 머물던 영역을 벗어나 먼 거리를 비행하는 데 쓴다. 개똥지빠귀의 머릿속엔 극동아시아의 지도가 들어있다. 그리고 나침반을 이용해 그 지도의 해안이나 산맥 또는 개활지를 따라 이동한다.



개똥지빠귀에겐 한 영역에 머물러 사는 토착민의 갑갑함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지금 여기 있어도 항상 떠나가야할 먼 바깥 세상을 염두에 두며 먹이를 비축한다. 그리고 때가 오면 살던 땅을 훌쩍 떠난다. 그들이라고 왜 이별의 아픔이 없을까만 그들은 길고긴 여행이 안겨주는 위험한 설레임을 더 사랑한다그 어떤 여행이든 복병은 있다비행을 가로막는 시련이다. 레이더의 강한 불빛, 태풍, 예상치 못한 폭설. 긴발톱할미새는 미네소타주의 남서부를 비행하는 도중 눈보라를 만나 하룻밤 사이 75만 마리가 동사했다.



철새는 두렵지만 복병을 감수한다. 철새가 한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은 사선을 넘는 일 이상의 공포를 느낀다. 그러므로 텃새들은 갑갑해도 살던 땅에 눌러산다. 야아아아! 소리치며 그냥 사는게 텃새다. 그런 면에서 철새에겐 눈물겨운 생존의 적극적 욕망이 있다.



어린 시절 호숫가에서 산 경험으로 볼 때 철새들의 작별은 독특하다. 한겨울을 함께 나던 큰고니며 청둥오리 기러기들 모두 얼음 녹고 버들잎 필 무렵에 나가보면 홀연히 떠나고 없다. 그럴 때에 느끼던, 작별도 없이 떠나버린 빈 자리, 그 빈자리의 허전함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때로 나는 작별은 그러해야한다고 여겼던 적도 있다. 어느 날 문득 사라지는 아름다움, 또는 어느 날 생각해보니 내 곁을 떠나고 없는 그. 나는 여운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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