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어느 젊은 부부의 소박한 약속

권영상 2018. 7. 30. 12:45

어느 젊은 부부의 소박한 약속

권영상




안성에서 닷새를 지내다가 오늘 집으로 돌아갑니다. 가다가 백암쯤에서 몸보신이나 좀 하고 가면 어떨까 그 생각이 들어 점심에 맞추어 길을 떠났습니다. 지난 해 가을부터 시작한 원고를 거의 열 달 만에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 동안 이 일에 몰두하느라 몸도 마음도 빈곤해졌습니다.


더구나 아무 기약 없는 비를 기다리며 폭염을 견뎌온 일은 말 그대로 공포였습니다. 덥다는 핑계로 일을 또 다음으로 미루지 않은 것만도 다행입니다. 그런 내게 몸보신이라는 말이 어울릴까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 동안 무던히 잘 참아준 나를 위해 뭔가 좀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지요.



백암 근방에 차를 세워놓고 삼계탕 집을 찾아들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몸보신이란 게 뭐 이 정도지요. 복날을 그냥 넘겨 미안하다는 마음으로 땀 흘리며 점심을 잘 마쳤습니다. 이러고 가면 좋아할 사람은 집사람이지요. 이 더운 날에 손수 밥을 차려 여러 날을 먹어봤지만 밥 차리는 일은 고역입니다. 나는 뿌듯한 마음에 라디오의 음악을 들으며  다시 차를 몰았습니다.



마성터널을 막 빠져나올 때입니다.

다음 음악 신청자의 신청 사연이 흘러나옵니다.

“남편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둔지 1년이 되어가네요. 오늘이 남편의 서른여덟 번째 생일입니다. 취업을 하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지만 안 되네요. 다시 취업하면 몸보신을 시켜주겠다고 했는데……. 남편 힘내라고 지난 날 남편과 함께 듣던 음악을 신청합니다.”

이윽고 가브리엘 포레의 ‘파빈느’가 흘러나옵니다. 과거, 한 때 좋던 시절을 회상하는 슬픈 스페인 춤곡입니다. 가본 적 없는 머나먼 세상을 꿈꾸듯 하는 바이올린의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 그걸 들으며 가자니 어째 마음이 자꾸 싸아, 해집니다.



취업을 하면 아내에게 몸보신을 시켜준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서른여덟 살 남편 때문입니다. 그 소박한 몸보신 약속이 이루어지려면 그들이 일자리를 구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네요. 한 집안의 남편인 그에게 일자리를 주지 못하는 우리 사는 세상이란 게 너무도 딱합니다.

몸보신을 한다며 삼계탕을 먹고 온 내가 오히려 미안합니다. 몸보신을 해야 할 사람은 나이 많은 내가 아니고 그들이고, 일을 해야 할 사람도 더는 내가 아니고 그들이어야 할 텐데 말이지요. 그래야 그들도 아기를 낳아 키우며 부부답게 살 수 있을게 아닐까요.



일하기 싫어 노는 것도 아니고 일 하려 애써도 일할 자리가 없는 젊은 그에게 자꾸 아이를 낳으라는 건 또 무슨 앞뒤가 맞지 않는 억지일까요. 살아오면서 국가라는 정책에 휘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들딸 가리지 말고 하나 낳아 잘 살자던 국가가 불과 3,40년 만에 자식을 여럿 낳으라며 자식타령을 하네요. 우리가 국가에 휘둘리며 살아온 게 어디 한두 가지인가요. 일자리 하나 구하기 어려운 나라에 자식을 자꾸 낳으라는 건 무슨 뜻일까요.



‘파빈느’는 잠시 후에 끝났지만 그들 부부의 ‘몸보신 사연’은 오랫동안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 음악을 들으며 그들 부부는 오늘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무 기약도 없는 답답한 비를 기다리듯 아무 기약도 없는 일자리 꿈만 꾸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들의 소박한 몸보신 약속이 서른아홉 생일 이전에 얼른 이루어졌으면 참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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