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권영상
기온이 점점 떨어진다.
갑자기 10도 아래로 떨어져 곤혹 치른 경험 때문에 날씨가 쫌만 어, 해도 나는 아, 하며 놀란다. 그런 선경험이 있어 이미 꺼내 입은 겨울옷을 쉽게 벗지 못한다.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집 뒤뜰은 지붕 높이만큼 그늘이 생겼다.
그 그늘 속에 바깥 수도가 있다.
아내가 수돗가 미나리 밭에서 뭔가를 골라내더니 저녁 식사에 방풍 속잎을 곁들여 미나리전을 부쳤다. 미나리 역시 월동에 들어간 줄 알았는데 향이 깊다. 허드레 수돗물을 가끔 부어주며 미나리를 거두는데 5년째 건재하고 있다.
말이 미나리 밭이지 손바닥만 한 물웅덩이다.
놀라운 건 대체 이 미나리들이 어디에서 왔는가, 그게 의문이다.
주변에 미나리가 살만한 도랑이나 물웅덩이가 없다. 우리 역시 미나리 근처에 간 적이 없다. 근데 어느 날 보니 수돗가 물웅덩이에 미나리가 자라고 있었다.
“대체 누가 미나리 심었지?”
그랬지만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시골에 살다 보면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다.
봄에 뜰 마당 풀을 뽑다 보면 별별 풀을 다 만난다. 쑥, 개망초, 방가지똥, 박주가리, 이런 풀은 그나마 알 만하다. 날개가 달렸으니, 주변에 살다가 바람을 타고 왔을 게 뻔하다. 여뀌며 띠, 달개비, 비름, 개미자리, 땅빈대, 매듭풀은 또 어디서 왔을까.
앵두나무 곁에 난데없이 뽕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걸 보면 귀엽고 재미난 상상이 떠오른다. 박새 아니면 곤줄박이, 아니면 직박구리가 한 짓이다. 산 너머 멀리 산밭에 사는 뽕나무 오디를 따 먹고 우리 집 마당 위를 슬쩍 지나가다가 빨갛게 익은 앵두를 보았겠다. 조금 모자란 듯 배가 출출한 새들이라면 한 개만 따먹고 가자, 하고 앵두에 이끌려 앵두나무에 내려앉았을 거다. 한 개만, 하던 것이 두 개를, 두 개만, 하던 것이 세 개를 따먹고 하다가 배가 부르자 찔끔 오디 똥을 누고 갔을 테다. 앵두나무 곁에 뽕나무는 그런 내력을 가지고 있겠다. 뽕나무는 어느덧 천성처럼 삐죽하게 자라올라 키가 앵두나무보다 더 크다.
올해 뜰 마당에서 발견한 이해할 수 없는 풀이 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나는 마치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뚝새풀이다.
뚝새풀은 주로 마른 논에 사는데 이른 봄부터 모내기 전까지 벼 글거리 가득한 논벌에 무리지어 큰다. 벼과 식물이고, 줄기 끝에 꽃이 피면 붉은 꽃이삭이 만들어진다. 뚝새풀은 한겨울 마르고 억센 풀만 먹던 소에게는 신선한 제철 음식이다.
뚝새풀이 한창 자랄 때면 아이들은 뚝새풀 크는 마을 앞 논벌에 모인다. 한겨울을 갑갑하게 지낸 아이들은 심심하다. 온몸이 근지러워 벅벅 긁어도 성이 안 찬다. 이럴 땐 겅중겅중 뜀박질이 약이다. 약 중에 효력이 큰 게 축구다. 뚝새풀 가득한 논은 요즘 말로 하면 론 그라운드다. 거기서는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칠 수 없다. 겹겹이 포개어 엎어져도 육신이 부러질 일이 없다.
축구공으로는 딴딴한 공이 아니라 대충 바람 빠진 물렁한 공이라면 더없이 좋다. 물렁한 축구공이 아니라 물렁한 배구공이어도 좋다. 가급적이면 하도 이리저리 차고 놀아 껍질이 벗겨진 공이라도 좋다.
어느 한 편의 남자애가 적을 경우, 여자애를 부른다. 기껏 한 명이냐고 투정을 부리면 두 명을, 그러고도 성차 하지 않는 동네 센 여자애가 눈을 부릅뜨면 갑자기 세 명이거나 네 명도 좋다. 이쪽 남자애 중에 누가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코 그들을 받아 축구를 시작한다.
경기란 주어진 룰과 주어진 시간이 없다.
목소리가 크거나 힘센 이가 있는 쪽이 이길 때까지 한다. 그러다 보면 서산에 해가 깜물 기울고, 뚝새풀 논에 풀어놓은 소들이 스스로 알아서 주인을 논에 두고 제 홀로 집을 찾아간다.
그 무렵이면 꼭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놀고 밥 먹어!”
아이들은 노는 데 정신이 팔려 그 소리를 못 듣는다. 해 질 무렵의 이 시간은 가장 힘이 솟구쳐오를 때다. 지금 밥이 문제가 아니다. 밥은 한 끼 굶어도 살지만, 겨우내 근지러워진 몸은 풀어내지 못하면 병난다.
한참 뒤면 또 누구네 엄마나 누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밥 다 식는다. 얼른 와!”
“늦으면 밥 없다!”
그러다가 종내는 이런 말까지 날아온다.
“진돌아, 밥 다 먹었다! 니 밥 없다.”
그쯤 되면 축구는 간신히 끝나고, 다들 뚝새풀 논을 걸어나와 집으로 찾아든다.
발끝에 어둠이 내려 신발 끈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근데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그 고향의 뚝새풀이 대체 어떤 경로를 거쳐 이렇게나 먼 안성, 논벌과는 아무 상관 없는 우리 뜰 마당에 들어와 살까.
그것은 왜 여기로 와 그 먼 세월 저쪽 안쪽의 기억을 새롭게 끄집어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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