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아날로그다
권영상
해마다 이맘때면 춘천에 볼일이 있다.
그 시간에 맞추려면 아침 출근 시간대 버스를 타야 한다. 차를 가져가도 좋겠지만 춘천 길은 버스가 좋다. 첩첩이 밀려오는 때 묻지 않은 산과 산 밑을 감도는 물길, 산 아래로 간간이 드러나는 산마을, 하루를 시작하려고 건너편 산 능선을 넘어오는 겨울새들, 그들을 바라보려면 승용차보다 버스가 좋다.
버스표 예매를 하러 집을 나선다.
나는 온라인 예매에 취약하다.
촌스러운 아날로그 스타일이다. 손으로 뚝딱, 예매하면 될 일을 몸으로 대신한다. 이러는 나는 나의 아날로그를 탓하기보다 오히려 나를 두둔한다. 동서울버스터미널까지 나들이 삼아 다녀오면 좋지, 그런다. 옷 한번 반듯이 챙겨입어 보고, 바깥바람도 쐬고, 운동도 되고. 그렇게 나를 위안하며 전철을 타고 가 강변역에 내렸다.
예매표를 사기 위해 창구 앞에 줄을 섰다.
사람들이 많다. 한참 기다린 뒤에야 내일 표를 예매했다. 표를 들고나와 보니 대합실 안에 설치된 무인 발권기가 13대나 있다. 몇몇 군인들이거나 젊은이들이거나 그것에 익숙한 이들 외에는 그 앞이 한가하다. 그런데도 나 같은 사람들은 오랜 관습처럼 길게 줄을 선 창구 앞에서 표를 산다.
어디 마땅한 카페에 들러 커피나 한잔하고 돌아갈 요량으로 대합실 안을 이리저리 걷는다. 버스 승강장 쪽에 있는 작은 가게 앞을 지날 때다. 불현 주간지 ‘선데이 서울’이 떠올랐다.
예전 그 가게엔 ‘선데이 서울’ 뿐 아니라 숱한 주간 잡지들, 유머, 만화, 성인용 잡지, 우리나라 중앙 일간지는 물론 순수 문학지들도 있었다. 당시 잘 나가는 시와 소설, 그해 문학상 수상 작품집도 있었다. 잘 살펴보면 수석이나 정원 가꾸기, 승마 같은 잡지들도 눈에 띄었다. 그러니까 대합실 그 작은 가게는 소규모 서점이나 마찬가지였다.
고향을 다녀오기 위해 가끔 강릉행 버스에 오를 때면 그 앞을 기웃거리곤 했다. 신문을 사들거나 표지가 요란한 주간지도 슬쩍 샀다. 다 읽으면 다른 이에게 넘기기도 하고, 곤하면 잠자고, 자다가 깨어나면 누군가 읽은 스포츠 신문을 읽었다.
그때는 정보를 책이나 신문에서 얻던 시대였다.
그때를 생각하며 대합실 작은 가게에 다가갔다.
그때에 보던 신문이며 주간지, 단행본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전 품목 5천 원’인 반지, 귀고리, 브로치, 머리띠 등의 액세서리와 스카프, 장갑 모자들이다. 작은 가게가 대합실 안에 두 개나 있었지만 두 가게 모두 비슷한 상품들이다.
이제 읽을거리는 거기가 아니라 손안에 든 휴대폰에 있다.
그 안에 옛날 우리가 얻으려 했던 모든 뉴스와 정보가 들어 있다. 어디서든 화면을 켜고 인터넷에 들어가면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지천으로 널려있다.
대합실 대기 의자 앞엔 대형 텔레비전이 놓여있고, 사람들 손엔 휴대폰이 들려있다. 읽을거리와 점점 멀어지는 세상이 됐다.
2층 카페를 찾아가 커피 한잔을 들고 한적한 창가에 앉았다. 한낮인데도 금방 눈이라도 내릴 듯 날이 어둑하다. 날씨 예보에 내일 눈 내린다고 했다.
눈이 내릴 거면 좀 많이 왔으면 좋겠다.
일 년에 두어 번 가는 춘천이지만 춘천 길은 눈 내리거나 눈 내린 뒤의 겨울 길이 좋다. 깊은 산속으로 펑펑 눈 내리는 풍경이 좋다. 눈 그친, 그 환한 설경, 버스와 함께 설경 속으로 끝없이 빠져들어 가는 이국 같은 풍경은 생각할수록 좋다.
끝없이 달려가던 버스가 어느 안전한 곳에 갇혀버리거나 돌아올 수 없는 상황에 빠지기를 상상하는 즐거움도 놓칠 수 없다. 눈에 갇혀 한 일 주일쯤, 아니 한 달쯤, 그보다 더 먼 한 십 년쯤 후에나 돌아오게 되는 신비로운 일이 문득 내게 벌어진다면 그것도 좋겠다. 펄펄 눈 내리는 날, 출근 버스에서 종종 생각한 게 있다. 이 버스의 종점까지 가보고 싶다는 생각.
어쩌면 나는 그런 그리움의 힘으로 이 거친 세상을 살아왔는지 모른다.
카페를 나와 2호선 전철에 오른다.
인터넷 예매를 했으면 못 겪었을 먼 시간 속을 다녀온 기분이다.
이게 아날로그의 멋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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