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일몰

권영상 2022. 2. 6. 16:48

 

일몰

권영상

 

 

해질 무렵이다.

아내가 좀 나와 보라며 방에 있는 나를 부른다.

나가보니 아내가 뒷베란다 창문을 열고 서 있다. 아내 얼굴이 붉다. 나는 금세 아내가 불러낸 까닭을 알아챈다. 저녁노을이다. 아내가 그걸 혼자 보기 아까워 나를 불러냈다. 나도 아내 곁에 선다. 내 앞에 펼쳐지는 일몰을 보며 나도 모르게 아! 하고 소리친다.

지금은 하루가 기울어가는 일몰의 시간이다.

서쪽 하늘에서부터 이쪽 머리 위로 넓고도 길게 노을이 번지고 있다. 그리고 그 하늘 아래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건물들이 붉은 노을빛에 잠기고 있다.

 

 

우리는 나란히 4층 창가에 서서 이 장엄한 일몰의 풍경을 바라본다. 우리라고 하지만 우리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버스에서, 퇴근을 서두르는 창가에서, 유리벽 엘리베이터에서, 가로수 아래를 걷고 있는 이 도시의 사람들도 어쩌면 지금의 우리처럼 잠시 멈추어 서서 일몰을 바라보고 있을지 모른다.

일몰을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게 있다. 끝도 알 수 없을 만큼 넓다는 우주의 이 한 모퉁이에 서서 내가 축제 같은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다는 신비스러움이다. 나는 어느 길을 가다가 문득 여기 이 별에 와 아내와 함께 살고 있게 되는지, 아득한 나의 길에 대한 궁금함이 일어나곤 한다. 나만일까. 나무든, 산중에 머물러 사는 새든 짐승이든, 깨어있는 돌멩이든, 문득 저 일몰의 풍경과 마주하면 그런, 오래된 질문을 만나게 될 것 같다.

 

 

아내는 하던 저녁 준비로 자리를 뜨고, 나는 그대로 남아 천천히 변해가는 시간의 발걸음을 본다. 빛은 힘을 잃어가고 그 자리에 어스름 땅거미가 천천히 내려앉는다. 낮의 시간이 밤의 시간으로 변해가는 빛깔이 이처럼 시시각각 명료한 때는 그리 흔치 않겠다.

이 무렵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거칠던 숨결이 가라앉고 고즈넉해진다. 마음을 아프게 하던 뾰족한 생각들이 녹아내린다. 욕망도, 분노도, 눈물도, 쾌락도 다 사라진다. 머릿속을 휘돌던 바람도 잠자고, 구름마저 가던 걸음을 멈춘다.

 

 

퇴근할 때면 가끔 만리동 언덕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만리동 언덕은 달리 만리재라고도 하는데 서울 서쪽의 인왕산을 빼면 서향의 언덕 중에 꽤나 높은 곳이다. 거기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보면 가끔 일몰을 만난다. 멀리 한강이 보이고 여의도가, 그리고 가까이는 공덕동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은 일몰을 보기에 좋다. 아무 거칠 것이 없다.

나는 일몰을 보느라 지나가는 버스를 보내곤 했다. 때로는 일몰의 풍경이 아까워 집으로 가는 길을 두고, 반대로 일몰을 향해 공덕역 쪽으로 걸어 내려갈 때도 있었다. 그 시간이면 요란하던 차 바퀴소리도 조용해진다. 시장 통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들 발걸음조차 차분해진다. 차들의 경적소리도 잔잔한 교향악 속의 악기처럼 멋있다.

 

 

어느덧 먼데 불교방송 고층 건물 위로 저녁별이 하나 둘 뜬다. 그 시각에 맞추어 건물들의 유리창마다 불이 들어오고, 길거리의 차들이 하나 둘 미등을 켠다. 지금은 떠나갔던 영혼이 돌아오는 때. 나도 나를 맞으려 내 안에 호젓이 불을 켠다. 방정맞거나 호들갑을 떨던 웃음도 이때만은 누그러뜨려야 한다. 지금은 집을 나가 어수선히 떠돌던 나를 받아들여 온전한 내가 되어가는 시간이다.

“엄마, 내일도 노을 볼 수 있어?”

누구네 집인지 여자 아이 목소리와 함께 창문 닫히는 소리가 난다. 나도 창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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