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지금 감기중입니다

권영상 2019. 1. 9. 14:53

지금 감기 중입니다

권영상




어릴 때는 외부 기온에 예민하지요. 문을 열고 나서다가도 불어오는 바람에 살짝 봄을 느끼면 입은 웃옷이 무거워 웃옷을 벗고 가만히 나서지요. 부엌에서 일하시는 어머니는 그런 걸 어찌 아셨을까요.

“감기 걸릴라. 옷 입고 가거라.”

어머니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자전거를 타고 들판으로 달려 나가지요. 눈 속에서 보리가 파랗게 크는 들판을, 마치 무지개를 찾아다니는 아이처럼 쏘다니곤 했지요. 그러고 집에 돌아온 날 저녁엔 영락없이 감기로 누워 끙끙 앓지요. 봄기운 속에 숨은 소르르한 찬바람을 몰라보고 한방 먹은 거지요. 어렸으니까 들뜬 마음에 철을 모르고 그랬던 거지요.



나이를 이만큼 먹었다고 좀 달라졌을까요.

해가 바뀌었으니까, 하는 핑계로 제주로 갔습니다. 직장에 있을 때는 직장일로 해마다 제주를 오갔는데, 직장도 그만 두고 나니 거기가 궁금했습니다. 그쪽의 푸른 대양을 향해난 바다와 야자수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눈 덮인 한라산이 정말이지 좀 보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다기 보다 좀 그립다는 말이 맞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한라산이 그리운 게 아니라 제주를 해마다 오가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서, 라는 말이 옳겠습니다.



큰엉 해안이 가까운 서귀포 남원에 숙소를 얻었습니다. 저녁 무렵 숙소에 들어 창을 열자 청록색으로 펼쳐진 끝없는 바다가 달빛과 함께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 이게 제주구나! 나는 비로소 제주에 온 것을 실감했지요. 제주, 그게 남쪽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한 부분인데도 우리들 마음의 제주는 그게 아닙니다. 제주는 우리들 마음의 섬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늘 그리워하는, 가 닿을 수 없이 머나먼, 일상의 피신처거나 스스로를 외로움에 가두워보고 싶은, 몇 번을 찾아가도 또 그리운 섬이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큰엉길 걷기에 나섰지요. 간밤의 바람 불 때와 달리 조용하여 덥기까지 합니다. 걷는데 불편할까봐 목도리를 벗었지요. 점퍼 속에 있고 다니던 조끼를 벗었습니다.

“제주 바람, 우습게보면 안 돼요.”

내가 이것저것 벗어던지는 걸 보던 아내가 한 마디 했습니다.

큰엉이란 높은 언덕이나 벼랑을 뜻하는 제주 말인데 바다를 따라 깎아지른 절벽위로 난 오솔길입니다. 길 양편은 보리장나무 섬쥐똥나무,담팔수, 사철나무 등이 울타리처럼 둘러쳐져 있지만 그 울타리를 조금만 헤치고 내다보면 코앞이 바다로 떨어지는 큰엉입니다.



그 길을 걷다보니 걷는 길이 아까워졌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길섶이 앉아 편하게 숨을 들이쉽니다. 바다가 저렇게 넓고 반짝일 수가 없습니다. 눈이 부십니다. 바람 한 자락이 그 위로 미끄러져 오네요. 섬쥐똥나무 잎만큼 쪼끔만 바람이 날아와 떨어지는 곳에 해국이 피고 감국이 노랗게 피고, 남은 것이 옷깃으로 소르르 숨어드네요.

호두암까지 걷고 돌아왔는데 그 길이 올레 5길입니다. 한적하고 고즈넉한, 가끔 술래잡기 하듯 댓숲길이 나오고, 동백꽃길이 나오고, 털 머위 노란 꽃이 웃어주는 예쁜 꽃길입니다.



그렇게 걸은 것뿐인데 그 밤부터 콧물이 흐르고, 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괜히 잘난 척 하더니.”

아내가 때를 놓치지 않고 잔소리를 합니다.

그 후,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때 얻은 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철없이 바람의 유혹에 넘어가는 일은 나이 먹어도 달라지지 않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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