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밤눈

권영상 2026. 1. 15. 17:50

 

밤눈

권영상

 

 

밤눈이 내립니다.

이러려고 오후부터 바람이 심하게 불고 날씨는 영하 4도를 오르내렸습니다. 선릉역 근처에 있는 치과에 다녀오는 길에 강남역에서 내렸습니다. 눈 내리는 밤길을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전철 탈 때가 오후 4시30분 쯤이었는데 지상에 올라오니 날이 컴컴해졌습니다.

여기서 집까지 대략 30분.

예보대로 눈은 함박눈입니다.

직장을 나온 뒤 눈을 맞으며 길을 걸어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오늘 같은 밤, 옛 시절처럼 밤눈을 맞아볼 셈입니다.

거대한 빌딩 아래로, 바람에 구르는 마른 낙엽처럼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다들 귀가하는 중이겠지요. 얼굴을 옷깃 속에 깊이 파묻고 걸어갑니다. 도시의 빌딩 밑을 걷는다 해서 시골의 어느 숲길을 걷는 것보다 더 마음이 춥다거나 그런 편견은 없습니다.

젊었을 때는 촌스럽다는 말 듣는 게 그리 좋지 않았지요. 그러나 요즘은 개의치 않고 나를 지칭할 때 ‘시골 사람’이니 ‘촌사람’이니 스스럼 없이 말합니다. 처음엔 부끄러웠지만 좀 덜 세련된, 좀 무지한 촌사람의 힘이 도시적인 것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던 거지요.

 

 

눈 내리는 1월의 밤길을 무턱대고 걸어보자는 뚝심은 촌스러움이 내 몸 안에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환한 도시의 불빛과 요란한 자동차 소음, 밀림 같은 빌딩 숲이 그리 싫지 않은 걸 보면 아직도 나는 도시를 선망하는 ‘시골 사람’입니다.

빌딩의 한 모퉁이를 돌 때 조그마한 칼국수 가게 불빛이 노랗게 보입니다.

갑자기 배고픔이 밀려옵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갈까 하다가 집에 가 먹지, 하며 집 근처까지 걸어왔습니다. 밤눈에 홀리기도 했고, 집 근처 묵은지 김칫국이 나오는 음식점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음식점이 드디어 나타났고 내 발길은 자연히 그리로 들어섭니다. 밤이든 낮이든 별나게 북적이는 음식점이지요. 나도 한 자리를 간신히 얻어 앉습니다. 이 음식점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그 안에서 식사하는 이들을 좀 얕보곤 했지요. 대체 뭘 먹을 게 있다고, 했는데 밤눈 내리는 날 내가 여기 북적이는 음식점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나는 묵은지 김칫국과 밥 한 그릇을 받아놓고 수저를 듭니다.

뜨거운 묵은지 김칫국 맛이 내 몸을 천천히 녹입니다. 춥고 먼 밤길을 걸어와 그런지 국과 밥이 맛있네요. 창문 밖으론 여전히 눈이 펄펄 내립니다. 눈길을 걸어 오는 이들 중에 나처럼 이 가게로 자연스럽게 찾아들어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기 위해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는데 ‘밥은 무료입니다’라는 글귀 아래에 큼지막한 밥솥이 보입니다. 괜히 조금 더 먹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커다란 밥솥엔 밥이 가득합니다. 밥주걱으로 밤을 조금 뜹니다. 그 곁에는 눌은밥으로 만든 숭늉이 세 개의 솥에서 끓고 있습니다.

“드시고 싶은 대로 드세요.”

머뭇거리는 날 보고 종업원이 국자를 들어 한 그릇 떠주네요.

그것들은 가지고 다시 자리에 앉아 조금 부족한 양을 채웁니다. 후후 불며 눌은밥 숭늉을 드는 만큼 내 몸에 남아있는 추위가 녹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여태까지 듣지 못하던 이 음식점 안 사람들 목소리가 다정하게 귀에 들어옵니다. 모두들 창밖에 내리는 밤눈 이야기, 가정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이렇게 춥고 눈 내리는 날, 돈 만 원으로, 주문한 밥을 먹고, 한 그릇을 더 먹을 수 있다는 게 어디냐는 촌스러운 생각이 불현 듭니다. 눈치를 보지 않고 따뜻한 밥과 숭늉과 반찬을 더 먹을 수 있다는 이 집 분위기에 괜히 가슴이 훈훈해집니다.

음식점 안을 둘러봅니다. 추운 바깥세상과 달리 이 안의 공기는 훈훈합니다. 이 음식점이 아침부터 자정이 가까울 때까지 손님들로 붐비는 까닭을 오늘에야 알겠습니다.

이 가게가 우리가 사는 아파트 앞에 들어선 지 15년은 되었을 겁니다. 그때 가게 주인은 통행에 불편을 주어 미안하다며 아파트 세대마다 옥수수 5통씩을 자루에 담아주었습니다. 우리 아파트가 300여 세대가 넘는데, 그 일을 지금껏 한 해도 거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품은 마음을 잃지 않는 거지요.

그 때문인지 여러 가게가 아파트 근처에 들어서고 나가기를 반복하지만, 이 음식점만은 굳건하게 15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킵니다.

“제가 촌사람이라서.”

어떻게 한결 같느냐고 물으면 음식점 주인은 부끄러운 듯 그렇게 대답하지요.

이게 거대한 도시와 공존하는 촌스러움의 힘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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