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은 새옹지마야, 그가 그랬다.
권영상
진홍이 형이 종종 쓰는 말이 있다.
새옹지마다.
30여 년 전에도 그 형은 내게 그 말을 했다.
그때 그 형은 태백시의 모 언론사에 있었다.
결혼도 했으니, 서울로 발령받으려고 여러 차례 노력했다. 하지만 그 일이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또 한 해 주저앉을 때 만났는데 그 일을 말하며 그는 내 무릎을 툭툭 쳤다.
“이봐. 정말이지 인생은 새옹지마야.”
나는 뭐가 새옹지마인지 의아해했다.
새옹지마란 중국의 고사다.
북쪽 변방에 사는 한 노인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넘어갔다. 그 때문에 노인은 낙심했는데 얼마 뒤 그 말이 준마 한 마리를 데려와 좋아하였다. 그 얼마 뒤 노인의 아들이 그 준마를 타다가 말에서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 일로 노인의 아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아 다행히 목숨을 구했다.
나는 혹시, 하면서 그에게 물었다.
“뭐 좋은 일이라도?”
그러자 진홍이 형이 숨긴 진실을 말했다.
“집사람이 아들을 낳았어.”
그때 나는 서울에 있었고, 그는 태백에 있었으니, 그런 사정을 몰랐다.
근데 아들이야 태백에 있어도 낳고, 서울로 올라가도 낳을 일인데 그 형은 그걸로 서울로 전출 못 한 일을 위안 삼는 듯했다. 그 아들을 자신이 데려온 준마쯤으로 위로한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어느 해, 그 형은 원하던 서울로 올라왔다.
가끔 만났지만 서로 사는데 바쁘다 보니 만난다 해도 술 마실 시간 여유가 없었다. 밥을 먹게 되면 밥이나 먹고 헤어졌지 지긋이 눌러앉아 깊은 얘기를 못 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할 시간이 왔다.
이미 우리 나이 일흔이 되었을 때다.
진홍이 형과 밥을 먹고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실 때였다.
“정말이지 인생은 새옹지마야.”
그 옛날에 들었던 새옹지마 이야기를 그 형이 또 꺼냈다.
며느리가 교통사고를 만나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거다. 다행히 위독한 상황은 아니지만 벌써 2주째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때 그 아들인 준마가 마흔 나이에 직장에서 물러났다는 거다.
나는 주름으로 얼룩진 그 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변경에 사는 노인의 일화처럼 그 불행이 어떤 반전의 씨앗이 되기를 바라는 염원 같은 모습이 그 얼굴에 엿보였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변경 지대 사람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 복병은 어느 곳에든 숨어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진홍이 형 며느리의 입원이나 젊은 아들의 실직은 어쩌면 변경 지대 사람들이 겪는 예상치 못한 복병과 같다.
“그래요. 잘 되려고 그러는 거겠지요.”
나는 그렇게 그 형을 위로했다.
그러고 보면 진홍이 형은 삼십대부터 일흔이 넘을 때까지 그 말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던 거다. 뭐 크게 가진 재산도 없고, 이렇다 할 배경도 없는 진홍이 형으로서는 의지할 거라곤 어쩌면 그 말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대체로 자신을 위로하는 말을 하나씩 가지고 산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라든가, ‘괜찮아. 나보다 힘든 사람들도 많잖아’, ‘바람처럼 잊으며 살어.’라든가 ‘힘들 땐 힘들다고 내게 말해.’ 그런 말을 하며 자신을 다독이며 산다.
직장 동료 중에 나와 나이도 같고, 또 어느 정도 마음을 열어놓고 지내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불행하게도 어정쩡한 50대 초반에 부인을 잃었다.
자녀가 둘 있는 그는 나름 힘들어 그랬겠지. 재혼을 했다. 그런 아빠의 행동에 충격을 받았을까. 아들은 외국으로 나가버렸고, 딸은 수녀가 되었다.
그때는 회식을 끝내면 마치 후식을 하듯 노래방에 들렀다.
술에 취한 채로 귀가하느니 노래를 불러 술을 깨운 뒤 들어가는 것도 의미 있는 순서 같았다.
노래 신청곡은 자신이 직접 입력하기도 했지만 대개 노래방 기계 쪽에 앉은 이가 신청곡을 독촉하거나 입력하고, 그러면서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내 동갑내기 친구도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그 시절의 매너대로 노래를 같이 불러주거나 노래에 맞추어 손뼉을 쳤다. 그런 떠들썩한 경황에도 그의 노랫가사가 귀에 들어왔다.
‘기쁜 날도 슬픈 날도 모두 흘러가더라.
누굴 탓해도 소용없고
누굴 원망해도 변하랴.
살다보니 알게 되더라.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지그시 눈을 감고 부르는 그 노래가 내 마음에 자꾸 와 닿았다. 그가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처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마지막 구절을 노래했다.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웃으며 사는 게 남는 거더라.’
우리는 우우우, 손뼉을 쳤다. 그리고 다음 곡 신청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노래방 코스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며 그를 생각했다.
그는 지나온 삶이 울적할 때 어쩌면 이 노래로 자신을 위로하며 혼자가 아닌 혼자로 외로이 사는지 몰랐다.
노래방에 모여 노래를 불러보면 다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의 근황이 노래에 드러날 때가 많다. 우리는 그런 노래로 자신을 위로하며 거친 세상을 견뎌 여기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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