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현득 선생님 문학자료 기증전에 다녀와서
권영상
어제(8월 19일) 도봉구민회관에서 중리 ‘신현득 문학자료 기증전’ 개막식과 ’고구려 아이의 동심’ 학술대회가 있었다. 영상 31도가 오르내리는 폭염을 뚫고 회관에 도착했을 때가 오후 1시 40분. 개막식은 붐볐고, 붐비는 틈을 타 대충 한 바퀴 돌아 학술대회가 있는 2층 세미나실로 갔다. 수많은 축사 끝에 선생님이 단에 오르셨다.
아흔둘 연세의 노시인.
선생님께서 선생님의 삶과 문학에 대해 말문을 여셨다.
“내가 12살 적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지요. 그때 아버지는 생활에 밝지 않으신 분이셨고, 나는 맏이였으므로 어머니가 하시던 일을 맡아서 하게 됐지요. 12살 나이에 가족을 위해 밥을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밤이면 아버지와 동생의 해진 옷을 늦도록 기웠지요.
집에서 10여 분 거리에 우물이 있었지요. 하루에도 몇 차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우물물을 길어 왔습니다. 어느 날 동네에 시집온 낯선 여자들이 ‘총각이 물동이를 이느냐?’며 놀리는 바람에 낮에는 물동이를 두 팔로 들어 날랐고 밤에는 몰래 머리에 이고 날랐지요. 그렇게 어머니 일을 대신하다가 마을 읍사무소에 급사로 취직했습니다.”
선생님은 거기서 잠시 말씀을 멈추셨다.
내가 아동문학을 시작한 지 10여 년쯤 되던 해다.
그 무렵 신현득 선생님 삶의 태도에 매혹당한 게 여럿 있었다. 성실함이요, 꼿꼿함이요, 단신인데도 언제나 속이 꽉 찬 가방을 메고 다니시는 신념이시다. 가방엔 연필과 연필깎이 칼과 지우개가 들어있는 필통과 붓펜과 붓펜으로 쓰시는 이면지의 일기장 묶음과 그리고 읽으시는 책들….
많은 후배가 그런 선생님을 흠모하였다.
근데 내가 선생님에게 매혹당한 일은 그 말고 그분께서 내시는 저작물의 책날개에 스스로 적으신 약력 때문이었다.
거기 약력은 대략 이렇게 적혀 있었다.
경북 의성에서 출생하였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눈구멍’이 당선되었으며, 그 후 이러이러한 책을 내셨다고 소개하신 뒤 그 네 번째쯤 되는 끝줄에 ‘12살 적에 의성 면사무소에서 급사로 일함’
나는 이 충격적인 자기소개에 아연했다.
그리고 이분의 길을 따라 걸어야겠다는 마음을 정했다.
삶의 어두운 부분을 감추고 싶어하는 세상에 선생님의 그런 약력 쓰기는 굴곡 많고 신산한 내 인생을 꼿꼿이 세우는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알기로, 그러니까 지난날 ‘월간 문학’에 ‘신현득 선생님과의 대담’이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께선 나를 필자로 부르셨고, 나는 선생님을 인터뷰했다. 그때 인터뷰한 선생님의 12살 이전의 일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선생님은 1933년 일제 강점기에 의성에서 태어나셨다.
일제에 땅을 빼앗겨 집안 살림이 어려워지자, 선생님은 4살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하셨다. 그러나 그곳마저 살기가 힘들어 9살에 다시 부모님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간난한 삶의 후유증 탓일까? 어머니는 선생님이 12살 적에 돌아가셨고, 동생을 잃는 아픔도 함께 겪으셨다.
신현득 선생님께서는 첫인사를 하시던 그대로 아직도 선 채 말씀하시다가 비로소 의자에 앉으셨다.
“제가 앉으나 서나 키가 똑같으니까 앉아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청중은 모두 마음을 놓고 웃었다.
의자에 앉은 단신의 선생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셨다.
“2년간의 마을 면사무소 급사 일을 청산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였고, 안동사범학교를 나와 국민학교 훈장이 되었지요.”
아련한 소년 시절의 추억을 끝내시고는 물활론에 관해 이야기하실 때 주머니에 둔 휴대전화에서 진동이 울렸다. 꼭 받아야 할 전화였다. 나는 허리를 낮추고 세미나실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
동시집 ‘동시백화점’을 내준 국민서관 편집자였다.
이곳저곳 학습지 출판사에서 내 동시를 인용하겠다는 내용과 그에 따른 저작료에 관한 통화였다.
통화를 마친 후 세미나실에 들어가려던 발길을 아래층 기증 자료 전시실로 돌렸다. 붐비던 전시실이 조용하다. 그제야 나는 아까와 달리 처음부터 찬찬히 둘러봤다.
신현득 선생님의 가장 잘 알려진 서사 동시집 ‘고구려의 아이’를 다시 만났다. 출판이 빈궁하던 1964년에 출간된 책이다. 6·25 동란이 끝 난지 10여 년 뒤의 우리나라 출판 상황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외 선생님께서 출간하신 동시집 41권, 선집 5권, 동화집 10권, 학습물 20종 신현득 관련 연구 논문 5종 등과 방정환 윤석중 어효선 조유로 시인 등의 저작물 7,783종 중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었다.
선생님께서 글을 쓰시던 방의 사진과 선생님께서 손수 사용하시는 물품도 전시되었는데 그중에는 이미 다 쓰신 볼펜 한 상자, 잉크가 다 해 갈아 끼워 쓰시느라 비게 된 볼펜심 한 통, 그리고 내가 한참 들여다본 몽당연필들.

깎아 쓰시고 깎아 쓰시느라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큼씩 작아진 몽당연필과 색연필 도막들을 둥근 ‘연근차 통’에 가득 담아 두셨다. 연필 한 자루조차 저렇게 작아지도록 쓰시는 선생님 성정은 대체 무얼까. 저렇게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작아지도록 쓰기로 한다면야 누구나 쓸 수는 있겠지만 저걸 버리지 못하고 저 통에 저렇게 가득 담아두시는 애틋함과 정다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일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아마 지금 세미나실에서 말씀하시고 계실 ‘물활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세상 모든 것에는 사람과 같은 본성이 있다고 보는데 그게 물활론이다. 그 때문에 몽당연필 하나, 다 쓴 볼펜 하나조차 버리려 해도 버려지는 그들이 불쌍하여 버리지 못하신 게 아닌가 싶다. 물활론이 아동문학이고, 선생님 동시는 물론, 세상 모든 동시의 근본이다.
이 전시도 끝나면 기증물을 다시 보기 쉽지 않겠지 하는 마음에 몇 순배나 전시실을 돌고 또 돌았다. 거기엔 2004년 4월에 출간한 내 동시집 ‘버려진 땅의 가시나무’가 유독 전시되어 있었다. 선생님께서 아껴주시는 후배 중에 오직 한 사람.
거기엔 나의 이런 글귀가 있었다.

‘큰 힘과 믿음을 주시는 신현득 선생님께. 4월에 권영상 드립니다. 2004년.’
선생님은 아동문학에 발을 들여놓은 내게 등불이 되어주신 오직 한 분이시다.
나는 나를 향한 그분의 선한 영향력을 항시 느끼며 여기까지 왔다.
전시실을 돌아나오는 내 눈에 벽에 붙은 선생님 어록이 들어왔다.
'내가 동시 시단에 나타나기 이전
한국 동시의 소재는
자연과 어린이 생활이 전부였다.
나 이후에 역사와 통일 문제, 우주 등으로 소재의 범위가 넓어졌고,
연작시와 이야기 시 등은
나를 포함한 몇 사람 시인이 같이 시도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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